요즘은 별일 없이 살아간다. 살아가다 보니 이미 그만그만한 생채기는 여러 개가 생겼다. 처음에는 죽을 것 같이 힘들더니 이제는 웬만한 생채기에는 무덤덤하다. 살아보니 생체기는 머지않아 세월의 흔적 속에서 또 다른 추억으로 자리매김할 것을 안다.
노를 젓는다. 물이 없어도 계속해서 저었다. 제자리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반들반들했던 손바닥의 표면에 자극이 전해온다. 자극은 거칠기도 하며 날카롭기도하다. 자극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굳은살을 만들어낸다. 굳은살은 처음에는 물렁했으나 여러 번의 고통 속에서 제자리를 찾듯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손바닥은 굳은살 덕분에 통증에 내성이 생겼는데 마음에는 아직 고통에 대한 내성이 자리잡지 못한 듯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일반적으로 길이 정해져 있기에 이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론에 가깝다.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고 그리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는 일, 이것은 사회가 만든 일련의 프로그램처럼 순응하지 않으면 이것이 마치 바이러스인 것 마냥 주변으로부터 외압이 들어오기도 한다.
이처럼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포부를 밝혔을 때에는 주변으로부터 알 수 없는 반응들이 반긴다. 응원보다는 걱정 어린 시선이나 과연 '네가 할 수 있겠냐'라는 깔보는 듯한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어적 표현이든 비언어적 표현이든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자기 자신을 돌보듯 '괜찮다'라며 보란 듯이 '내가 가는 길이 정답이다'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보이지 않는 길을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늘 두려움이 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마다 '이게 맞는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며 자기에 대한 확신에 점차 감소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꺼이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세상이 만만치 않듯이 돛에 역풍이 불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몹쓸 시련을 맞이하기도 한다. 시련이라는 것이 운이라는 것과 닮아있다. 둘 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나는 사람을 무너뜨리고, 또 하나는 사람을 일으켜 세운다. 이것이 운인지, 시련인지 알 수는 없다.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 큰 행운이 찾아온 것은 맞겠지만 그 결과가 꼭 운으로 매듭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가령 운을 흥청망청 쓴 결과 폐단의 길을 걷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시련이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서 누구든 넘보지 못할 경험이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성장할 수 있는 자강제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인생을 단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꿈을 위해 수많은 침묵이라는 시간 속에서 아파했고 쓰라렸던 순간들을 인내했으며, 치열함 뒤에 찾아오는 뜨거움을 울컥하듯이 토해내며 모든 것을 불태웠던 순간들을 눈물로 게워내어 바닥을 흥건히 적셨을 때 비로소 돛이 순풍을 맞아 배가 나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