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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Jul 19. 2022

마음을 내어준 시간들

만남과 이별에 대하여.

4월 30일이었다. 처음 바질 싹을 마주한 것이. 그날로부터 벌써 두 달 반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나는 다섯 번째 글을 쓰고 있다.


그동안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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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러 번의 쓸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눈 뜨자마자 안부인사를 건네고 퇴근하자마자 안부인사 건네고, 애들 데리고 와서 한두 번 들여다보고 자기 전에 꼭 들여다보는 마음과는 달리 글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일상의 바쁨과, 약간의 일탈과, 몇 번의 좌절이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일상의 바쁨. 내 일상을 늘 바쁘다. 미취학 아동 두 명을 육아한다는 건 언제나처럼 쉽지 않다. 장거리 출퇴근은 늘 피곤하다. 하지만 그나마 운전하는 시간만큼은 내가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 듣고 싶은 음악도 듣고 브런치에 올라온 작가님들 글도 읽는다. 말 그대로 "자유시간"이다. 가족들의 생일을 챙기고, 모임에 나가고, 두 아이가 다니는 기관 행사에도 참여하고. 언제쯤 나의 일상이 조용하고 단조로워질까.


약간의 일탈은 저번 주에 3일간 사내 교육으로 강사 양성과정을 수강했다. 약간 강의가 산으로 가는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다시 만난 전담강사님은 반가웠고 두 번에 걸친 실습은 너무도 떨렸다. 그래도 새로운 인연을 만났고 오래간만에 업무에서 학교에서 벗어나 다른 공간에서 색다른 미션을 수행하면서 나름 리프레쉬가 된 기분이다. 그리고 그동안 미뤄두었던 강의 제안을 오늘 충동적으로 수락하고 말았다. 과정 마지막 날 강사님과 인사를 하며 다음번에 만날 때 강의 흑역사를 많이 만들어 오겠다고 말했는데, 아마 그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번이 두 번째 강의. 앞으로 퇴직할 때까지 몇 번의 강의를 더 하게 될까. 기대 반 걱정 반 미쳤다.. 하는 생각 100%다. 모든 강의 하는 분들은 존경한다.


몇 번의 좌절이란 오늘의 주제인 식물과 관련되어 있다. 우선 가장 슬픈 소식은 그동안 애지중지 키웠던 방울토마토를 파양 했다. 어느 순간부터 방울토마토는 자라지 않았다. 자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잎이 자꾸 안으로 굽어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네가 꽃을 피우지 않아도, 열매를 맺지 않아도 그냥 나랑 같이 살자.라고 생각했지만 볼 때마다 마음이 안 좋았다. 그리고 친정엄마가 집에 오신 어느 날, 엄마가 이 토마토는 사람으로 치자면 장애를 가진 것 같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화단에 있는 꽃이 많이 핀 묘목으로 바꾸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해오셨다. 고민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방울토마토가 열리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묘목 기르기가 어느 순간 내 삶의 낙이 되었고, 낙이 된 만큼 마음을 많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나의 방울토마토가 베란다라는 공간을 벗어나 엄마 화단, 즉 자연으로 돌아가면 제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엄마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방울토마토는 나를 떠나갔다. 며칠은 베란다를 나갈 때마다 마음이 침울했다. 관심 없던 아이들도 화분들 중에 가장 큰 방울토마토가 없어지자 어디 갔냐고 묻기 시작했다. 나는 침통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아이들에게 우리 집에서는 방온이가(방울토마토 애칭=방온이) 제 모습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할머니 댁 화단으로 보냈고 곧 꽃이 활짝 핀 새로운 방울토마토가 올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아이들은 금세 수긍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베란다에 혼자 남아 방온이의 자리를 보며 그동안의 시간을 되짚어보았다. 사람을 제외하고 내가 이토록 마음을 준 생명체가 있었던가. 아, 있었지. 우리 치즈 초코.(동생이 기르는 고양이들) 시간 날 때면 늘 치즈 초코와 이불에서 뒹굴던 나날들이 무색하게 결혼을 하고 동생이 서울로 올라가면서 볼 수 없어지자 이제는 서로(나와 고양이) 낯가리는 사이가 되어버린 우리들. 우리 방온이도(방온이라는 애칭은 나의 남편이 내가 방울토마토를 우리 아기라고 칭하는 것을 보고 아예 셋째 삼으라고 놀리며 지어준 이름) 그렇게 곧 내 마음에서 사라지겠지. 여전히 마음이 심란하다.


키우던 방울토마토가 간지 며칠 만에 엄마는 엄청나게 키가 크고 꽃이 많이 피어있는 토마토 묘목(이라고 하기에는 나무가 더 어울리는)을 가지고 오셨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아이에게 정을 붙이는 중이다. 첫 묘목에게 너무 마음을 많이 주었는지, 지금 베란다를 지키고 있는 키다리 방울토마토는 영 낯설다. 하지만 이 야이가 꽃이 지고 난 뒤 방울토마토를 맺기 시작하면 급격히 마음이 가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나를 베란다 화원으로 처음 이끈 바질은 한 번의 분갈이 이후 아주 쑥쑥 크고 있다. 조만간 더 큰 화분에 분갈이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할 정도이다.

사진보다 실물이 더 큰데, 사진만 찍으면 아담해 보이는 우리 바질. 분갈이도 해주고 다 큰 잎사귀들은 따주어야 더 잘 큰다는데, 분갈이도 엄두가 안 나고 잎을 따는 건 더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조만간 용기를 내보려 한다. 바질씨앗을 본 적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사람 몸에 있는 "점"만하다. 그 점이 싹을 틔우고 이렇게 크다니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인터넷에 바질 키우기를 검색해보니 내가 큰 화분에 분갈이를 했으면 진짜 나무처럼 쑥쑥 큰다는데, 사실 마음 한편 너무 그렇게 커지면 아직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식물 울렁증"이 되살아날까 봐 선뜻 안 내킨다. 지금의 모습이 아담하니 딱 예쁜데. 그래도 너를 위해서는 분갈이를 해야겠지.


그리고 바질 옆에 객식구도 한 명 늘었다. 아직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는 이 식물은 아무것도 심지 않은 채 흙만 있던 화분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갑자기 사랑초가 쑥쑥 커서 뒤덮은 화분 한편에서 고개를 쑥 내밀더니 쑥쑥 크기 시작한 이 식물. 엄청난 생명력으로 크는 사랑초에게 덮이기 직전에 작은 화분으로 옮겨주었다. 옮기면서 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죽지는 않고 상태 유지 중이다. 그런데 요새 어째 한쪽으로 기우는 게..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무명(無名)이와 바질이

강사 양성과정 수업을 들으며 첫 실습에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 듦이라면"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다. 강의 말미에 "저는 이제, 화분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저에게 누군가 '너도 이제 늙는구나~'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나이 듦에 집중하여 좌절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합니다. 생명을 받아들이는 나이 듦! 멋있지 않나요?"라고 했었다. 그런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멋있지만은 않다. 말을 하지 않고 움직임도 없는 생명체도 생명이기에 키우는 과정에서 오는 기쁨과 슬픔을 다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원래의 나로 돌아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화분을 다 치워버리고 누가 생화를 선물해도 진저리를 치는 나의 모습으로. 그러면 벌레도 안 봐도 되고, 죽을까 살까 동동거리지 않아도 되고, 예상치 못한 이별에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손길에 천천히 그리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식물들을 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본다.


"너희가 생명이 다하여 소멸될 때까지는 나와 함께하자. 지금처럼 꿋꿋하게 살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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