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1
한 사내가 새까만 검정 속을 걷고 있다.
사내의 앞모습을 비추다가 사내의 시선으로 돌려지는 카메라.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사내가 걸어가는 길의 옆에.
점점 가까워진다.
자그맣게 목소리가 들린다.
사내가 걸어갈수록 점점 더 가까워진다.
어린 아기 엄마의 목소리다.
아기 엄마는 아기를 품에 안고 어르고 달래고 있다.
점점 아기와 엄마가 선명해지며 사내에게 가까워진다.
사내가 아기를 안고 있는 아기 엄마의 곁을 지나갈 때,
아기 엄마는 아기에게 말한다.
아기 엄마 (힘들지만 사랑에 가득 찬 목소리로)
“사랑해, 우리 아가. 언제나 엄마가 지켜줄게.”
사내는 떨리는 숨을 들이마신다.
#2
사내가 계속 새까만 검정 속을 걷고 있다.
사내의 앞모습을 비추다가 사내의 시선으로 돌려지는 카메라.
두 사람의 형체가 보인다. 사내가 걸어가는 길의 옆에.
점점 가까워진다.
자그맣게 목소리가 들린다.
세월이 조금 지나간 듯, 약간의 주름이 엄마에게 새겨져있다.
엄마와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손을 잡고 있다.
아이는 엄마에게 무언가가 그려진 종이를 건네준다.
엄마는 그 종이를 보며 밝게 웃으며 말한다.
유치원생 엄마 (기쁨에 찬 목소리로)
“이거 엄마 그린 거야? 우리 딸 천재인 가봐, 어떡해!
고마워, 평생 간직할게, 사랑해 우리 딸!”
아이는 대답한다.
유치원생 아이 (당당하고, 맑은 목소리로)
“나도! 사랑해, 엄마!”
사내는 주먹을 힘주어 세게 쥐고 그 모습을 스쳐지나간다.
#3
사내는 계속해서 새까만 검정 속을 걸어간다.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와 아주머니가 보인다.
사내가 그 옆을 지나갈 때에
여자 아이는 학교에서 상을 받았다며 아주머니에게 자랑한다.
아주머니는 말한다.
아주머니 (세월이 조금 지나간 목소리로)
“우리 딸, 너무 기특해서 어떡해? 너무너무 사랑해.
엄마 딸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우리 딸!”
사내는 이를 앙다물고 그 옆을 지나간다.
#4
사내는 계속 까만 검정 속을 걸어가고 있다.
대학교 졸업복을 입은 젊은 여자와 그 앞에 꽃다발을 든 아주머니가 보인다.
여자는 학사모를 벗어 아주머니의 머리에 씌워준다.
여자와 아주머니는 마주 보며 활짝 웃는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인다.
아주머니는 스마트폰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젊은 여자와 팔짱을 낀다.
누군가 (중년의 남성 목소리로)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그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5
사내는 계속해서 검정 속을 걸어가고 있다.
젊은 여자가 정장을 입고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오늘이 면접 날처럼 보인다.
젊은 여자는 아주머니를 힘껏 끌어안고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
아주머니는 여자가 문을 닫은 후에, 두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를 한다.
사내의 걸음이 처음으로 멈춘다.
사내는 잠시 서 있다가 다시 걷기 시작한다.
사내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고, 울음소리를 필사적으로 참는 듯이 보인다.
#6
사내는 아직도 검정 속을 걸어가고 있다.
사내의 앞에 누군가 주저앉아있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 누군가.
그 누군가는 젊은 여자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아주머니다.
사내가 이를 앙다물고 그 옆을 지나칠 때에
아주머니는 혼잣말로 말한다,
아주머니 (힘이 빠진 목소리로)
“더 잘해줬어야 됐는데.. 미안해, 우리 딸..”
사내는 그 말을 듣고는 발을 헛디디고 넘어진다.
사내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한다.
쓰러져있는 사내에게서 자그맣게 울부짖음이 들린다.
마치 문명을 겪지 못한 짐승과 같이 느껴진다.
사내의 절규는 서서히 커져간다.
사내는 있는 힘껏 울어댄다.
고통에 가득 찬 목소리로 신음하며 사내는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운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사내는 무릎을 꿇고 앉아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서 아주머니를 본다.
아주머니는 사내를 쳐다보고 있다.
아주머니가 입을 연다.
아주머니 (중후한 신사의 목소리로)
“이런 식이지.”
#7
아주머니 (중후한 신사의 목소리로)
“이런 식이지.”
‘쿵!’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새까맣던 검은 공간이 새하얗게 변한다.
아주머니가 있던 자리에는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새하얀 백발을 멋스럽게 넘긴 노신사가 서서 금으로 장식된 지팡이를 오른손에 짚고 있다.
노신사는 사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말한다.
노신사 (연륜이 보이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빛나는 삶이었어.”
사내는 노신사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다.
허나 노신사를 바라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내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아직 아주머니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내는 목이 쉰 목소리로 자그맣게 중얼거린다.
사내 (힘없고 쉰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노신사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단호하게 말한다.
노신사 (단호하고 무감각한 목소리로)
“이미 늦었어.”
하얗던 주변이 다시 까맣게 물들어간다.
모습이 보이는 건 사내와 노신사뿐이다.
노신사가 말 한다.
노신사 (권위적이고 심판을 내리는 듯한 목소리로)
“너의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노신사가 손에 쥔 지팡이를 땅에 부딪힌다.
다시금 ‘쿵!’ 소리가 난다.
노신사는 그 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온통 검은 세상 속에 사내만 존재한다.
사내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서,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보인다.
점점 사내에게 가까워진다.
자그맣게 목소리가 들린다.
처음 장면의 젊은 아기 엄마가 아기를 어르고 달래며 걸어온다.
서서히 다가오는 아기와 엄마.
사내의 옆을 지나칠 때 아기의 엄마는 아기에게 말한다.
아기 엄마 (사랑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사랑해, 우리 아가. 언제나 엄마가 지켜줄게.”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아기 엄마를 사내가 보는 듯한 카메라 화면.
아기 엄마가 사내의 옆으로 지나갈 때 카메라도 같이 돌아간다.
아기 엄마가 멀어지고, 자그마해지는 뒷모습이 남자의 앞모습 뒤에 숨겨져 사라진다.
아기 엄마의 발걸음 소리가 서서히 멀어진다.
사내의 얼굴을 화면에 가득 담는 카메라.
사내의 절망에 가득 찬 표정이 카메라에 한가득 담긴다.
그랬다가 서서히 카메라의 영역이 넓어진다.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의 전신이 보인다.
사내는 검정 속에 혼자 있다.
카메라가 점점 뒤로 빠지며
카메라 화면을 9등분 했을 때
한가운데 부분에 사내의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이 담긴다.
‘쿵!’ 소리와 함께 장면이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