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배

단편

by 장순혁

1.

"인쟈 얼마 안남았댜."

"..얼마나 남았는디요."

"몰르지. 아마.. 닷새 정도?"

"..알것슈."

의원,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춘배.

"남은 시간 동안 어메한테 잘혀.
난중에 후회하지 말고."

"죽는 건 난디, 왜.."

춘배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암튼 감사혀요. 갑니다.
남들한테는 말하지 말아주시구."

"..그려."



2.

"아가, 옷 추르렴. 고뿔 걸릴라."

"인쟈 한여름이요, 엄니.
안 그라도 더븐디 그런 말 마소."

"뭔 여름이 이리 춥다니?
봄 올람 멀었다. 얼른 저고리 챙겨입그라.
고뿔 걸리면 눈물, 콧물 다 뺄 거인디..
여 뒷산에서 산수유 알멩이나 따와야 쓰겄네."

"아, 좀!
엄니. 길 만든다고 거 다 볏던 거 모르는 사람이 없는디 자꾸 뭔 소릴 하는겨!"

마루에 걸터앉아
연신 손부채질을 해대는 춘배에게
건넛방에 앉아, 그의 어메는 같은 말들만 늘어놓는다.

"그려? 그럼 산수유는 어디 가서 구한담?
아가, 고뿔 걸린다니까는.
옷 추르려, 어서."

질린다는 눈으로 제 어메를 보던 춘배는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마루 구석에 벗어던져 놓은
땀으로 범벅이 된 저고리를 가져다 대충 걸친다.

그 모습이 자못, 만족스러운 듯 슬며시 미소를 짓는 그의 어메.
너덜너덜한 여닫이창을 끼익, 하고 닫는다.

창이 닫히자마자 저고리를 대충 벗어 던지는 춘배.
다시 손부채질을 시작하지만
올여름은 왜 이렇게도 더운 것인지,
춘배는 서늘한 마루에 아무렇게나 드러눕는다.
하늘을 보면, 해가 구름에 가리어진다.
잠시나마 식은 바람이 분다.
뜨거운 열기가 한결 가신다.



3.

"총각. 우리 아들 본 적 없는감?"

"또 뭔 소릴 하는겨.
엄니 앞에 있는 나가 엄니 아들인디?"

"에이, 울 아들냄은 총각보다 더 신수가 훤히 생겼는걸.
우리 아들 못봤는감?"

"에휴. 그려, 그 아들내미는 얼마나 더 그, 신수란 게 생겼나?"

"지 애비 안 닮고 나랑 똑 닮았으니,
아주 어, 그래, 미남이지, 미남.
눈도 크다랗고, 코도 오똑허니 잘 생겼지."

"아이고, 울 엄니 닮았음, 엄니 말대로 미남이것네, 미남이것어."

"두말하믄 입 아프지.
아니, 중한 건 이것이 아니지.
총각. 우리 아들 본 적 없는감?
나무하러 나갔는디 왜 온들 안한댜?"

춘배는 마당 구석에 한가득 나무를 실은 지게를 내려놓으며 답한다.

"..아직 나무 베는 중이여.
언제 올거냐 물어보니 조금만 더 베다 온디야."

"아이고, 그 어린 것이 혼자..
총각이 가서 얼른 데려오면 안 돼야?
산이 얼마나 험한디, 그 아가 어뜨케 혼자 내려오것어?"

툴툴대는 춘배

"나도 혼자 갔다, 혼자 오는디 뭐 어떤감."

"울 아들은 어리자네.
길이라도 일어버리면 어째.
혹시 모르는 일인겨.
호랑이한테 물려갈 수도 있자네.

그라지말고 총각이 수고 좀 혀줘, 으이?"

춘배는 아침에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좀만 쉬었다 데리러 갈텐게, 엄니도 마저 쉬셔."

"그래줄랑가? 고마우이.
총각 부모가 교육을 아주 잘 시켰구먼 그래.
어른 공경이 최고여, 글치?"

춘배는 씁쓸하게 웃는다.

"맞지, 맞어.."

춘배어메는 잔뜩 신이 나 춘배에게 말을 건넨다.

"이따 울 아들냄 데꼬오면 같이 밥이나 먹구 가.
내가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놓을라니까.
손이 야무져서 내가 맛나게 잘혀, 요리는."

방안의 춘배어메는 자기 다리가 썩어버렸음을 이렇게 잊고는 한다.
춘배가 어렸을 적부터 허리가 굽어져라 밭일만 해온 탓에
식물이 뿌리부터 썩듯이 춘배어메도 다리부터 썩은 것 같다고 춘배는 생각했다.
아니면 그 치매라는 것 때문에 머리가 썩었으니
다리까지 썩어버린 건가.
춘배는 방안의 어메를 본다.
춘배의 공허한 눈에,
마치 아이처럼 순진한 눈망울을 가진 춘배어메가 담긴다.
자기 앞의 아들에게 아들을 데려와 달라 부탁하는 춘배어메의 마음이
춘배에게는 가슴에 박히는 커다란 대못으로 다가왔다.

"그럼 갔다 올텐게 방에서 푹 쉬고 계셔."

양손을 탁탁 맞부딪혀 털면서 일어나는 춘배.

"총각!"

춘배가 뒤돌아 다시 제 어메를 보면

"우리 아들 못 봤는감? 물 길러 갔는디 오덜안혀."

고개를 푹, 숙이는 춘배.

"..그렇잖아도 데꼬 올라고, 우물 갈라든 참이여."

"잘됐구먼. 가서 울 아들놈 좀 데리고 오드라고.
같이 와서 밥이나 먹구 가.
내가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놓을라니까."

"..."

목이 메는 춘배. 말없이 일어나,
길어놓은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퍼서 머리에 끼얹는다.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그대로 휘적휘적 걸으며 집 밖으로 나간다.


4.

잔잔히 일렁이는 춘배.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괜히 옆에 있던 돌멩이를 떨어뜨리면
첨벙, 하면서 메아리치는 춘배의 얼굴.
그 모습을 멍한 눈으로 본다.

"어이, 춘배."

우물을 바라보던 춘배가 고개를 돌린다.
춘배의 친구 준식이다.

"거서 뭐 하는감?"

"뭘허긴 뭘혀. 그냥 있는 거지."

"그냥 있기는?
그러고 서있지 말고 같이 주막이나 가자고.
탁주 한 사발이라도 먹여야 될 거 같은 얼굴이여, 자네."

"내 얼굴이 뭐 어떻다고, 울 엄니는 신수가 훤하다는디."

"나도 모르는 새에 훤하다는 말 뜻이 달라졌는감?"

툴툴대는 춘배의 손을 잡아끌며
준식은 주막의 빈자리에 앉는다.
곧이어 차려지는 싸구려 탁주와 짠지 몇.
비싼 건 먹어본 적도 없고, 먹어도 구별도 안 될 거니 이게 맞다.
탁주 몇 사발 들이켜니,
시끄러운 준식의 말들이 아름다운 새들 지저귐처럼 들려온다.
춘배는 비실대는 웃음을 풀어본다.
해 지는 하늘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춘배와 준식의 얼굴.
춘배가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을 건넨다.

"..준식이 자네, 후회 안 혀?"

"뭘 후회를 안 혀."

"알자네, 뭔 말인지."

"..."

처음으로 준식의 입이 다물어진다.
찬물을 끼얹은 듯, 갑작스레 굳어지는 분위기.
준식은 해 지는 하늘만 새삼스럽게 바라본다.
구름의 수를 세고, 날아가는 새의 수를 세고,
다시 구름의 수를 세고,
하늘만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입을 연다.

"하지, 후회.
지 애비 산골짜기에 가져다 버리고서
후회도 안 하면 인간도 아닐 거니께.
아니지, 인간이면 그딴 짓거리 자체를 안 했을라나?
인간이라서 그랬을랑가? 모르것네..
그래도 말여."

"..."

"돌이키진 않을겨."

"..왜?"

"입은 늘어나는디 버는 건 하나야.
지 새끼들 배 주리게 할 바에는
지 애비를 버리는 게 나아.
그게 좋은 애비니까, 아녀?"

지 새끼들을 위해 지 애비를 버린 애비와
지 새끼의 새끼들을 위해 버려지기로 한 애비.
자식들에게는 과연 둘 다 좋은 애비일까.

"난중에 말여.."

"어."

"난중에..
니 새끼들이 니 갖다버리면 어칼거?"

"..버려져줘야지. 울 아부지처럼. 푸흐흐.."

준식도 비실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춘배도 다시 비실거리며 웃는다.
비실거리며 웃는 두 남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오늘의 해는 산 너머로 저문다.


5.

발개진 얼굴로 잠든 지 어메를 바라보는 춘배.
얼굴도 쓰다듬어보고,
손도 잡아보고,
편히 잘 수 있도록 이불과 베개도 정리한다.

"..춘배야.. 우리.. 아들.."

춘배 어메의 잠꼬대에 춘배는 하던 것을 멈추고 어메를 본다.
잠꼬대가 끝나고 다시 고른 숨소리가 난다.
춘배는 조심스레 방을 나와 문을 닫는다.
마루에 걸터앉는다.
초승달이 가녀리게 피어난 하늘.
소리도 없이, 춘배는 주룩주룩 눈물을 흘린다.
춘배의 얼굴이 젖는다.


6.

동이 틀락 말락 하는 어슴푸레한 새벽.
춘배는 잠든 제 어메를 깨운다.

"엄니, 인제 인나셔요."

"으음.. 왜?"

"아들래미 보러 가셔야지.
지 저 언덕에 있다고 데리러 오라자네.
엄니 좋아하는 꽃도 피었다고 보러오라는구만."

"..울 아들이 그려? 그라믄 빨리 가보자구."

춘배 어메는 잠에서 깨어 화색이 도는 얼굴로
마루까지 기어간다.
타기 쉽게 세워둔 지게에 춘배 어메는 올라타고,
춘배는 지게를 짊어진다.

한산한 마을.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아직은 잠에 든 시각이다.
춘배 어메는 간만의 바깥나들이가 좋은 듯 노래를 흥얼거린다.
지 어메 흥얼거리는 소리에도 굳은 표정의 춘배.
말없이 걸음만 옮긴다.
마을을 지나, 논밭을 지나, 산을 오른다.
잠깐도 쉬지 않고 춘배는 걷는다.
구슬땀을 흘리는 춘배.
춘배 어메는 그런 춘배에게 손수건을 건네준다.
땀을 닦고 어메에게 돌려주자,

"총각이 가져. 나이를 먹으니께 인쟈 나는 땀이 안나드라구."

"..."

춘배는 손수건을 품속에 집어넣는다.

그렇게 얼마나 산을 올랐을까,
춘배가 미리 봐둔 언덕에 도착하는 춘배와 춘배 어메.
햇빛 따사롭게 내리쬐는 언덕.
언덕 가운데 그늘진 나무에,
춘배는 조심스럽게 어메를 내려준다.
주변을 둘러보던 춘배는, 문득 꽃밭으로 가서
꽃을 한 아름 꺾어 제 어메에게 전해준다.
꽃향기를 맡으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춘배 어메.
춘배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인쟈 엄니 아들 올 텐게, 좀만 기다리소.
난 갑니다."

"총각!"

"..예."

"고마우이, 델따줘서잉!"

"..아녀요. 갑니다."

"아, 글고 말이여!"

그러나 말도 다 듣지 않고 뒤돌아 훌쩍 떠나는 춘배.
벌써 작아져가는 춘배의 뒷모습을 보며
춘배 어메는 말한다.

"..미안허다."

물기 어린 목소리로

"미안허다, 춘배야.."


7.

아무도 없어 황량한 집안엔
바람만이 마당부터 마루, 안방, 창을 드나든다.
바람이 드나들 때마다 살짝살짝 열리는 창의 틈 사이로,
손수건을 꼭 쥐고서 어메의 방에 누워있는 춘배가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 한다.
그러다, 춘배의 손에서 손수건이 툭, 하고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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