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들이여

단편

by 장순혁

그녀는 집시였다.
내가, 우리가 집시가 되기 전부터.

진주 목걸이와 청옥석 반지는 그녀의 신비로움을 한층 더하였고,
그녀가 두른 자주빛 망토는 세상의 풍파로부터
그녀를 지켜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밤이면 별자리를 보며
다음날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일러주었다.

그녀가 말해준 곳에는 언제나
목을 축일 수 있는 맑은 샘과
단내를 풍기는 과일 나무들이 펼쳐져 있었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치 우리를 이끌어주기 위해 하늘이 내려준 선지자같은 사람.
신비하고, 조금은 의문스러운 사람.

전염병이 돌면 숲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왔고,
배가 고픈 아이들이 칭얼거리면
어디선가 토끼들을 잡아와 주었다.

그녀는 우리들의 선생이자 길잡이, 지주였다.

당연히 우리는 그녀를 의지하였고
내심 그녀도 우리를 조금이나마 의지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던 차에 그녀는 사라졌다.

목걸이와 반지, 망토.
그녀를 대표하였던 것들과
한 장의 편지만을 남겨두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그녀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우리는 급하게 편지를 읽어보았다.

'우리의 크기만 한 바위를 두드리면
곧게 뻗은 길을 일러줄 겁니다
어쩌면 바위의 크기가 우리만 한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기준이란 참으로 모호한 것이라
기준을 정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을 가진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곧게 뻗은 길과 우둘투둘한 길
둘 중 무엇이 더 나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다면 적어도 발이라도 편한 길에서 걷는 게 더 낫겠지요

당신의 눈을 믿지 마십시오
눈이란 겁이 많아 자기 앞에 있다 하여도
애써 무시해버릴 수 있답니다
감각이란 건 그런 것이기에

그러니 오직 마음으로 바라보십시오
때론 객관적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렇기에 객관적인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작은 몸에게 선사할 수 있을 것이기에

길을 막은 바위는 팽팽히 부풀렸던 몸을 좁히며
하나의 돌멩이로 남겨질 겁니다
바위와 돌멩이의 차이는 단순히 가로막거나 가로막지 못하거나가 아닙니다
당신이 그것을 바위로 여기느냐, 돌멩이로 여기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당신의 발자국을 믿지 마십시오
오직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보랏빛 숲속을 가로질러서
꿈꾸는 강을 건너십시오
깊고 넓은 그 강이란
영원히 헤엄쳐도 반대편에 닿을 수 없는 동시에
한 걸음만에 끝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적셔짐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걸음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해하려는 것들은 그런 감정들을 먹고 자라니

나뭇잎 한 잎, 물줄기 한 갈래,
우리가 아닌 것이 없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만이 우리가 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소박하지도 않은 자격을 말입니다

하늘색 구름을 가로질러서
흰색 하늘을 건너십시오
바다와 하늘의 차이를 명확히 하는 사람과
조금도 모르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구름 한 조각, 빗줄기 한 방울,
우리가 아닌 것이 없답니다
그러니 가끔은 우리, 자신에게 말을 건네십시오
괜찮느냐고, 괜찮느냐고

나의 자매, 나의 형제,
나의 가족들만이
그곳에서 살 수 있었지요
그곳은 너무나 아름다워
오히려 아름답지 않아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가치를 아는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그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고
그렇기에 그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진실을 아는 자의 숙명일까요

오직 나의 가족들을 위해
하늘은 집과 밭과 과일을
그 땅 위에 내려주었지요
그렇기에 나는 집으로 가는 길과
밭을 일구는 법
과일이 맺힌 곳으로 여러분을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나의 가족들을 앗아가
속절없는 바람에
나의 눈물만이 흐릅니다
새로운 가족들을 만들어도 나는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건 내 가족이지만
내 가족에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니었으니

모든 것을 주었던 하늘은
나의 모든 것들을 앗아가
웃음이 머물던 곳에
쓸쓸함만이 심어집니다
고독함만이 자라납니다
나의 쓸쓸함과 고독함이 그대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황폐해진 그대들을 바라볼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어느샌가 겁쟁이가 되었기에

나의 가족들만이 살 수 있던 곳
나의 가족들이 사라진 지금
그 누가 그곳에서 살 수 있으려나요
내가 다시 그곳을 찾을 수 있을까요
별자리를 보고 또 보아도 그곳의 흔적은 발자국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의 가족들이 자리하던 곳
나의 가족들이 없어진 지금
나조차도 그곳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곳에 다다른대도 나는 알지 못하고 또다시 떠나기를 반복할 겁니다
영원히 떠돌아다니겠지요

매서운 북풍도
뜨거운 열기도
그곳에는 머물지 못합니다
그곳은 너무나 짧은 기쁨인지라
긴 슬픔을 가진 것들은 감히 도달할 수 없습니다

뜨거운 남풍도
차가운 눈송이도
그곳에는 엉기지 못합니다
그곳은 가시 하나 자라나지 못하는 곳이라
우연히나마 어느 곳에 걸리지도 못할 것입니다

나의 자매들이여
나의 형제들이여
나의 가족들이여
내가 놓아버린 나의 이들이여
그대들이 나를 찾아주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그대들이 나를 잊어주기를 바랍니다
나를 잊어주기를 바라는 동시에 나를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엇갈리는 나의 마음을 나도 명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 누구도 그럴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 그대들을 기다립니다
그대들이 나를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외로움과 괴로움이 뒤섞인 흑빛 두 눈이 나를 만나 청색 반가움으로 변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저도 용기를 내어 볼품없는 품속에 그대들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원의 시간이
그대들을 나에게로 데려오기를
나로 하여금 그대들을 향해 가게 하기를

둥근 이 곳에서 모난 우리들이
서로의 빈 공간을
서로의 튀어나온 부분으로 채울 수 있기를

아픔이 없음을 바라는 대신
치유되리라 알게 해주기를

슬픔이 없음을 바라는 대신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을 준비할 수 있게 해주기를

나의 자매들이여
나의 형제들이여
나의 가족들이여
나를 놓쳐버린 나의 이들이여
기다림과 늙어감은 본래 우리의 것이니
당당하게 기다리며 당당하게 늙어가기를
세월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모든 것이 역행된 곳에서도 시간만은 정직하게 흘러가니

나, 그대들을 바랍니다
바라고 또 원합니다
이기적이지만 이렇게 오늘도 내일을 바랍니다
내일이 오늘이 되면 다시 내일을, 또 내일을 바랄 겁니다

영원의 시간이
나도 그대들에게로 데려가기를
나의 목걸이와 반지, 망토가 그 길을 안내해주기를

보잘 것 없고 하찮은 내가
감히 그대들에게 이리 편지를 남깁니다

그대들을 잊지 않을 터이니
그대들도 나를 잊지는 말아주십시오
아니, 부디 나를 잊어주십시오
아니, 나를 잊지 않는 동시에 잊어주십시오

이렇게 혼란스럽고 부족한 나를
허황된 나를'

그녀의 목걸이와 반지, 망토는 빛을 잃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는 그녀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녀는 선지자 같은 게 아닌
그저 외로운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그녀를 강제로 의지하며 몰아세운 게 아닐까

무리에서 버려진 외로운 동물이
자기보다 작은 것들을 키우며 위안을 받으려 했지만
그것들은 결국 자기와 다른 것들이라
되려 더 외로워진 것이 아닐까
작은 것들은 그것도 모르고 외로운 동물의 몸에 상처를 더해버린 것이 아닐까

아픔이 없는 곳
슬픔이 없는 곳
그렇기에 너무나 외로운 곳
그곳이 그녀의 고향일까

결핍이란 차오르는 것
배가 고프기에 먹을 것을 찾고
목이 마르기에 마실 것을 찾고
영혼이 메마르기에 누군가를 의지하고
삶이 고달프기에 억척스럽게 살아야만 하고

더는 누구도 우리의 길을 정해주지 않는다.
더는 누구도 우리에게 맑은 물과 과실이 맺힌 곳을 알려주지 않는다
더는 누구도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약초들을 캐주지 않는다
더는 누구도 배곯는 아이들을 위해 토끼들을 잡아와 주지 않는다

남겨진 우리는 내일이 오리라는 것도 믿지 못한다
오늘이 오늘인지도 모호해진다

어쩌면 그녀는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목걸이와 반지, 망토를 우상처럼 여기며
그녀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녀를 찾아야 할까
아니면 그녀의 부재를 인정하고 새로운 그녀를 찾아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를 부정해야 할까

무엇 하나 정하지 못하는 우리는 먼저 버려짐에 익숙해져야만 하는 걸까

아픔과 슬픔이 없는 곳이라는 건
다시 말해 아픔과 슬픔이 가득 채워진 곳이라는 것

아마 다시 그녀가 우리를 찾아온 대도
우리는 그녀를 알아볼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매몰차게 쫓아내고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없는 때에 도착하고 나서야
한없이 슬프게 후회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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