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퇴근 후 집에 돌아왔다. 보글보글 된장찌개 끓는 냄새와 아빠를 부르며 현관으로 달려오는 사랑스러운 내 딸이 나를 반긴다. 이윽고 아내도 내게 와 오늘도 고생했다고 안아준다. 평범하지만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 이게 나의 평범한 현실이었다. 아름답고, 달콤한 현실. 나는 밥을 먹고, 씻고,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와 잠시 놀아준 뒤, 내일 출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 침대에 누워 그렇게 얼마나 잠에 들었을까? 어렴풋이 잠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며 깨어난다. 왠지 모르게 두 눈이 따가울 정도로 시리다. 잠시 눈을 감고, 시린 눈이 진정되기를 기다린다. 한결 편해진 느낌에 눈을 다시 떠보면 보이는 것은 익숙한 천장. 그러나 갑자기 머리가 핑핑 돌며 어지럽다. 구역질이 밀려온다. 잠시 게워낼 것 없는 헛구역질을 해댄다. 짙은 기침이 쏟아져나온다. 늘 자기 전에 둔, 침대 옆 자그마한 탁자 위의 물컵을 찾는다. 한번에 들이켠다. 어지러운 정신을 간신히 차리고 침대에 다시 눕는다.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이 밀려온다. 속이 좋지 않다. 평소와 무언가가 다르다. 그런데 그 다른 게 과연 뭐지? 감히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그간 보내왔던, 어제가 되어버린 오늘들과는 생판 다른, 전혀 다르게 새로운 오늘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평소대로라면 알람 소리와 함께 나는 개운하게 침대에서 햇살의 온기를 느끼며 일어나 아내가 깨지않도록 조심조심 움직이고 아내의 숨소리를 들으며 침대 밖으로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어딘가 불편함에 억지로 잠에서 깨어나버렸고 비치지 않는 햇살에 의아함을 품으며 옆에 누워있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아내를 보았다. 조심스레 아내를 향해 뻗은 손은 이내 아내를 향해 닿았고, 차디차게 식은 그녀의 몸은 더는 따스한 온기를 내게 주지 못했다.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아내의 얼굴과 몸, 아내의 겁에 질린 표정. 목에는 벌겋게 부어버린 손자국이 보인다. 아내가 이런 표정을 짓던 걸 내가 본 적이 있었던가. 잠시 상념에 빠진다. 바로 구급차를 불러 그녀를 병원으로 옮길 수도, 아니 어쩌면 인공호흡과 심폐소생술이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매일 똑같던 일상을 즐기던 내게 변화란 썩 기분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라는 것은 애초에 뒤엎음이 기본 골자라, 내가 변화에 대해 꺼려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억지로 고개를 돌리지조차 않고, 그녀의 죽음을 바라보지 않고 나는 평소처럼 조심조심 일어나 안방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평소대로라면 나는 커피를 내리며 그 향에 취한 채로 신문을 읽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전형적으로 완벽한 아침의 시작.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박살이 나있는 커피를 담는 잔과, 날카로운 발톱에 찢긴 듯이 난도질당해 있는 신문이었다. 대단히 소시민적이며 작고 소중한 나의 아침이 비참하고 처참하게 망가져버린 것이다. 거실 탁자 위의 식빵은 곰팡이가 피어있었고, 냉장고를 뒤져보아도 버터나, 잼 등 빵에 발라먹을 것들이 없었다. 뭐, 있어도 바를 식빵이 없으니 의미는 없겠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눈을 돌려 거실 벽에 매달린 커다란 시계를 본다. 나의 사랑스러운 딸은 아직 잠에 취해있을 시간이다. 그러다 싸늘한 아내가 생각이 난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나는 딸의 방으로 향했다. 분홍빛 벽지가 둘러싼 딸의 방은 새근새근 들려올 딸의 숨소리와 장난감들과, 스케치북, 크레파스, 색연필 등으로 어질러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내 예쁜 딸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치워놓는다면 편할 것이다. 그러나 딸의 방문을 연 내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황량한 회색 벽지와 방 한가운데에 홀로 놓인 나무로 만들어진 목마뿐이었다. 아내가 딸을 임신했을때 아빠의 첫 선물이라며 내가 직접 깎아 만든 자그마한 나무 목마. 어제까지만 해도 아빠 사랑한다고 말하며 품에 안겨오던 딸의 존재마저 나무 목마 하나만 남겨두고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나는 크게, 눈에 띄게 동요하지 않았다. 나조차도 낯설 정도로 평온을 유지했다. 하룻밤 사이에 아내는 차갑게 식은 고깃덩어리가 되고, 딸은 거의 방째로 사라지고, 커피와 빵과 버터와 잼도 없이 맞이한 아침은 꿈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 이 모든 것은 꿈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을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 하룻밤새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아내와 흔적 하나 없이 사라진 딸? 말도 안되지. 꿈이 분명했다. 그래, 이왕 꾸는 꿈이니 나는 이 상황을 즐기기로 하였다. 나는 잠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집 밖으로 나섰다. 제일 처음 눈에 보인 것은 오지랖 넓은 이웃집 총각이 자신의 차를 세차하는 모습이었다. 그 총각은 어김없이 나를 보자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잘 잤느냐는 인사를 건넸고 나는 평소 그에게 하고 싶었지만 꾹꾹 참아왔던 대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총각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줄 것이 있다고 말을 한 후, 내 마당 구석에 놓인 두꺼운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그가 열과 성을 다해 빛을 낸 자동차의 보닛과 창문, 트렁크를 나뭇가지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 총각은 멍하니 차를 향한 나의 우악스러운 구타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멀거니 바라보다가 황급히 나를 제지하려 들었고 나는 나뭇가지로 그의 차를 두들겨 팬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두들겨 패버렸다. 나는 진작에 그가 나의 아내와 입에 담기도 싫은 관계였음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내가 출근을 하고 나의 딸이 등교를 하면 나의 아내는 그 총각을 자기의 집으로 끌어들여 마음껏 욕구를 해소하였다. 내가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나 나의 딸이 등교를 하지 않는 날이면 나의 아내는 친정에 가겠다느니, 동창 모임이 있다느니, 갖가지 핑계를 대며 우리의 집에서 나가 그의 집으로 향했다. 나는 그것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내 가정의 무너짐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그것을 방관한 것이다. 겁쟁이에 비겁한 놈이자 뼈빠지게 일해 집에 돈이나 갖다바치는 호구. 그게 현실 속의 나였다. 솔직히 옆집 총각은 덩치도 커다랗고 힘도 세서, 그의 앞에서는 허허 웃으며 그를 피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꿈속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니까짓게 감히 내 아내를 건드려? 총각의 머리를 후려치고 또 후려치다가 마침에 나뭇가지를 거꾸로 들고 뾰족한 부분을 그의 머리로 조준한 뒤 나뭇가지를 총각의 머리에 박아넣었다. 우지끈, 하는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친히 무릎을 굽히고 앉아 총각과 눈을 마주치며, 그 총각의 눈에서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로부터 흐르는 피가 그의 눈에 들어갔음에도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아니, 감지 못했음이 옳은 표현이겠지. 그래도 어떤가, 어차피 지금은 다 꿈인데. 그는 더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지 못했다. 뭐, 이제 나랑은 더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나의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 꿈은 너무나 즐거웠다. 내가 마음속에만 담아둔 것을 모조리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니! 신나게 액셀을 밟던 나는 내가 다니는 회사에 도착했다. 늘 그랬듯이 사원증을 사용해 회사에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옷도 차려입지 않은 나의 파자마 주머니에 사원증이 있었다. 역시 꿈은 대단해. 잠옷 차림의 내가 나의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앉지도 않고 나의 볼펜을 꺼내 부장님에게 다가갔다. 부장님은 언제나 그러셨듯이 나를 보자 불평을 쏟아내셨고 나는 꿈에서마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에 부장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장님의 목에 볼펜을 수차례 꽂고 빼기를 반복했다. 부장님의 육중하신 몸은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빨간 피와 함께 쓰러졌고 주위의 사원들은 모두 비명을 질러댔다. 하여간 호들갑들은 알아준다니까. 그래봤자 꿈인데 뭐 어때? 나는 내친 김에 온몸의 힘을 짜내어 부장님의 시체를 열린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에휴.. 평소에 뭘 드시기에 이렇게 무거운 거야? 아니,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욕심이 그득그득 들어서 그런가? 부장님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피가 내 몸도 적셨다. 꿈속에서마저도 도움이 안돼요, 이 인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쾅 소리와 함께 창 밖, 바닥에 부닥친 부장님이 조각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를 따르는 작은 사이렌 소리도 들려왔다. 사이렌 소리는 점점 더 커져갔고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꿈속에서 다닌 적이 없었기에 새삼 신기해했다. 이게 루시드 드림인가, 자각몽인가 하여튼 그 비슷한 건가? 하며 나는 감탄했다. 괜히 볼펜을 딸깍거리며 부장님의 자리에 앉았다. 이게 부장님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우리 부서군. 좋아, 아주 평화로워. 그러나 그 평화도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가 흐른 후에, 검은 옷을 입고 무장한 경찰들이 나의 주위를 둘러싸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다. 잠깐만, 뭔 소리인지 알아먹어야 내가 당신들 말을 따를 거 아니야. 그렇게 소리만 질러댄다고 뭐 대화가 돼? 나는 그들에게 몸소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깨우쳐주려 다가갔다. 그들은 경고의 말을 수차례 내질렀고 나는 어차피 꿈인데 뭐 어쩔거냐는 생각으로 그들의 말을 무시하며 계속 그들을 향해 걸음을 뻗었다. 그들이 내게 들이민 총구에서 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음? 나는 극심하게 느껴지는 통증에 가슴 부근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나의 가슴은 뻥 뚫린 구멍 여러 개와 그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갔다. 이렇게 생생하다니. 이런 고통도 느낄 정도의 꿈이라니! 어쩌면 꿈이 진짜고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것이 실은 꿈이 아닐까? 이런 철학적 생각을 더 이어갈 틈도 없이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고 얼굴을 회사의 대리석 바닥에 처박았다.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나의 몸에서부터 뻗어져 나오는 빨간 피는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가고 그 피가 마치 나의 생각이라는 듯 나는 생각이 점차 느려졌다. 꿈 속에서 죽으면 현실로 깨어나는 거겠지.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 왔나보다. 나는 이 꿈을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지는 꿈은 처음 겪어봤으니. 아쉽지만 꿈에게 작별을 고해야 한다. 덕분에 오랜만에 재밌었다. 또 이런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생각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