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이제 와서 젊음을 논하기에는 이미 너무 늙어버렸군.
애석하게도 말이야.
하얗게 센 머리와 축 늘어난 살가죽,
깊게 패인 주름들.
몇번이고 보아도 적응이 되지 않는게 늙어버린 모습들이야."
자신의 손과 팔을 둘러보다
이마의 주름을 메만지는 그.
"다 늙어빠진 지금의 내 이야기를 누가 듣겠는가?
내가 자네같이 젊었어도 나 같은 노인이 이렇게 말하면
반감부터 사고, 색안경끼고, 시작할걸세.
노망난 노인네, 술 좀 그만 먹으라고 야단법석이나 떨겠지.
옘병, 술은 입에 대지도 않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노친네, 노땅 소리 들어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구역을 정해놓는 법일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구역을.
그러니 자기가 겪은 경험 밖의 이야기들은 다 터무니없는 소리 취급하는 거지.
이해를 못할 테니까.
어찌보면 딱하고, 불쌍한 것들이야.
자기 스스로 한계를 정해놓고,
그 한계 밖은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니까.
그래놓고 나는 나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정신승리까지 하니까.
..얘기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바꿔 생각해, 진정으로 젊음의 의미와 본질을 얘기하려면 젊음을 이미 완결내어,
오롯이 지나보낸 늙은 자들에게만이 그 자격이 있는 것 아니겠나?
젊은 이들이 젊음에 대해 논하는 것은
단 한 번도 장례식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죽음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과 같아 보일 수도 있어.
수박 겉핥기식의 지식으로 어줍잖게 뽐내고 싶어하는 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들의 관점은..
어떤 모양이겠는가?
곱지는 않겠지, 음.
뭐.. 가타부타 말은 늘어놓았지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내가 지금 젊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말이야.
젊음을 몇번이고 겪은 늙은 이의 자격으로.
나름 통찰력있다는 말 좀 들어본 사람의 존재를 걸고."
그는 내게 다가오더니 품 속에서 약 봉투를 꺼냈다.
입을 강제로 벌려 알약 두어개를 쑤셔넣고 삼키게했다.
내가 정말 약을 먹었는지 확인한 후
그는 파이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담배 연기는
그와 나의 사이를 마치 벽이라도 된 듯 가로막았고,
나는 그 연기를 마시며 수차례 기침을 해댔다.
기침을 해댈 때마다 몸이 떨렸고,
선천적으로 허약하게 태어난
나의 평소 몸 상태라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겠지만,
신기하게도 지금은 그저 목이 간질간질할 뿐이었다.
"괜찮나? 몸이 원래 안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고개를 끄덕이는 나.
그는 흡족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자네는 아직 젊어. 갓 떠오른 태양빛에 제 몸을 자랑하는 푸른 새싹같아.
나도 한때는 자네 같았던 때가 있었다네.
한없이 푸르고, 존재만으로 생명력을 뿜어내던 때가.
길을 가다 개미를 발견하면 쭈그려 앉아 관찰하고,
학교 시험을 망쳐 울기도 하고,
좋아하는 여자한테 고백도 하고,
결혼도 해보고.
믿겨지나?
나도 태어날 때부터 이런 늙은이는 아니었단 걸세.
그런 사람이 어디있어.
다른 평범함 사람들처럼 나도
한때는 어렸었고,
또 한때는 젊었었고,
지금은 자연스럽게 이리 늙어버린 것일 뿐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간과하곤 하는 것 같아.
자기는 영원히 어리고, 젊을 줄 아는 거야.
자기들도 언젠가는 늙고, 둔해지고, 죽을거란 걸
까먹기라도 하는 건지, 원.
늙어감이 슬픈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라네.
모두가 늙는 게 사실이지만,
그 누구도 나의 늙음을 진심으로 서글퍼하지 않는다는 것.
어리고 젊었던 나를 온전히 기억하는 건
이 세상에서, 이 우주에서 나 하나 뿐이라는 것 말일세.
이대로 내가 늙어 죽어버리고 나면,
나라는 사람이 한때 이곳에서 살았다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존재했었다고,
그 누가, 그 무엇이 알고 기억해줄까.
나를 추억해줄까, 과연."
그의 파이프 담배는 그의 말을 입증하는 듯이
군데군데 녹이 슬어있었다.
"나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살았다네.
자네가 추억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내게는 바로 어제 일이야.
자네가 역사라 생각하는 것들이 내게는 추억이고.
우리 각자의, 시간의 흐름은 다르다는 이야기야.
토끼와 거북이 수준이 아닌 빛과 돌멩이의 수준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
빛의 속도에 돌멩이가 맞출 수 있겠는가?
아니, 애초에 빛의 존재 자체를 돌멩이가 포착할 수 있겠는가?
돌멩이는 이렇게 생각하고 말겠지.
'저런 건 다 부질없어'
'저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
'다 허상이야, 허상'
그야말로 한심하게 말이지."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우리에게 어제와 내일은 없어.
오직 오늘만 있을 뿐이야.
우리는 언제나 오늘을 살아갈 뿐이라네."
그는 중간중간 듣기 싫은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몸 자체가 흔들리는 기침을 수차례 뱉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려는 것을 몸이 강제로 가로막는 듯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
"허억.. 허억.."
그는 그와중에도 담배를 찾는다.
파이프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신다.
거칠었던 숨이 잔잔해진다.
그의 표정에 여유가 다시 깃들었고,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일은 절대로 오지 않아.
내일은 없어.
내일은.
하물며 다음 생은 어떻겠나?
존재할 거라 생각하나?
다음..
어니, 애초에 자네는 다음을 믿나?
오늘은 어제가 되고,
내일은 오늘이 되어가는 현실인데,
다음 따위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아, 이건 물론 내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니 억지로 공감하지 않아도 된다네.
그냥 노인네의 주절거림뿐으로 넘겨도 괜찮아.
공감해준다면 고맙겠지만."
아무리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들여다봐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옛날 이야기 하나 하자면.."
그의 주름진 눈에 처음으로 광채가 돌았다.
"내 어머니가 내게 들려주신 노래라네.
어머니도 본인의 어머니께 전해들은 노래일세.
퀘퀘하게 먼지 쌓인 옛날 노래라는 말이야.
그래도 썩 나쁜 노래는 아니니 한 번 들어보게."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강이 부르네, 강이 부르네.
약속을 지키라 하네.
시간이 되었다 하네.
강이 부르네, 강이 부르네.
나의 자리를 남겨두었다 하네.
나를 영원히 기다린다고 하네.
강의 목소리를 들으라.
시간의 흐름을 느껴라.
우리는 절대 도망갈 수 없네.
강의 목소리를 들으라.
시간의 흐름을 느껴라.
너는 내게로 올 수밖에 없네."
그는 입을 손으로 가리며 다시 기침을 수차례 했다.
그의 입가에 바알간 핏자국이 번졌다.
그러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입가의 피를 스윽, 닦아냈다.
익숙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손에 묻은 피를 본인의 옷에 문지르는 그.
그는 나를 보며 윙크를 찡긋해 보였다.
"자, 이런 내 모습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불쌍하고 구차해보이나?
연민이란 두 글자가 마음속에 떠오르나?
뭐..
뭐가 되었든 상관은 없지.
본론으로 돌아가서,
내가 자네에게 이 노래를 불러준 이유가 궁금하나?"
그의 눈빛에서 광채가 사라졌다.
눈 앞에 있는 것이
정정한 노인이 아니라
끝이 없는 슬픔과 외로움으로 가득 채워진 지푸라기 인형인 것만 같았다.
"자네도 보았다시피 나는 이제 시간이 없어.
그 빌어먹을 강이 다시금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나를 부르고, 또 부르고, 계속해서 부르고 있네.
머리가 너무 아파.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어.
이 지끈거리는 두통을 억제할 수만 있다면 지옥이라도 가고 싶을 정도야.
그런데 말이야, 나는 아직 할 일이 많다네.
손가락으로는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물론 아무리 나라도 영원히 죽음을 피할 수는 없겠지.
나도 그건 알고있는 사실이지.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미루는 정도라면..
미루고 미루다가,
내가 할 일을 모두 마칠 시간 정도까지 미룰 수 있게 된다면, 괜찮지.
그러나 인간의 수명은 너무나 짧아.
몇 명을 갈아치워야 하는 지 모르겠어.
그래도..
해볼 수 있을 때까지는 해봐야 되는 것이 사람의 용기 아닌가.
난 내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강에게로 향할 수 없으니,
내 자네에게 부탁 하나함세.
자네가 나 대신 강에게 전해줬으면 좋겠구만.
나는 아직 갈 생각이 없다고 말이야.
덧붙여 아직 갈 시간도 아니라고.
또 그에 덧붙여.."
파이프담배에서 바싹 타버린 담뱃잎을 툭툭 털어서 바닥에 버리는 그.
"때 되면 오지말라해도 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내 얼굴을 직접 맞닥뜨리고도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나 보자고.
너의 그 저주받은 주박도 나를 막지는 못했다고.
그리고.. 엿이나 먹으라고 말이야."
그가 온몸이 의자에 밧줄로 묶여
옴싹달싹 못하는 내 팔에 주사기를 꽂고 약물을 주입했다.
억지로 뜨려고 해봐도 눈이 강제로 감겨 왔다.
또렷이 명확했던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몽롱함이 몰려와 어지러운 와중에
점점 자그맣게 멀어져가는 그의 마지막 말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름 모를 젊은이여, 자네의 몸은 고맙게 잘 쓰겠네.
무슨 종교를 믿는지, 무교인지조차도 모르지만,
무엇이 됐건 자네가 바라는 곳으로 가기를 바라네.
이 아름답고 숭고한 희생.. 다시 한 번 말해서 미안하지만 정말 고마워.
잘 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