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은 하얀 겨울입니다

단편

by 장순혁

"도끼를 들고 가요
어깨에 살짝 걸치고

바알간 단풍 나무를 벨거랍니다

도끼를 들고 가요
어깨에 살짝 걸치고

단풍 나무는 수액도 빨갛답니다

도끼를 휘둘러요
온몸에 힘을 주고선

바알간 단풍 나무가 쓰러집니다

도끼를 휘둘러요
온몸에 힘을 주고선

등허리가 꺾이고선 죽었답니다"

음악이 끝나고,
붉은 수액을 질질 흘리는 베어진 단풍 나무를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애니메이션 주인공.
점점 멀어지며 작아지다가,
문득 단풍 나무를 팽게치고 달려와 화면에서 튀어나온다.
자기가 쓰던, 손잡이까지 붉은 수액으로 물든 도끼를 건네준다.

"난 이제 필요 없어서!
게다가 넌 이걸 제대로 쓸 수 있을 거야!
이미 익숙하잖아, 그렇지?
안녕!"

다시 화면 속으로 들어가
단풍 나무를 업고 집으로 향하는 주인공.
고개만 돌려 윙크를 찡긋, 하더니 곧 사라진다.
검은색 화면.
끝, 이라는 글자가 한동안 자리하더니,
테레비 화면이 꺼진다.
꺼진 테레비와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과 시뻘건 도끼.
그 사람은 소파에서 일어나 도끼를 주워든다.
채 마르지 않아 끈적거리는 수액이 사람의 손에 들러붙는다.
이리저리 도끼를 휘둘러보는 사람.
고개를 갸웃하더니 테레비에 휘둘러 두동강을 내버린다.
도끼를 잡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도는 사람.
그러다 도끼를 놓쳐버리면서 동시에..

펑!

잠에서 깨어납니다.
기지개를 켭니다.
하품을 합니다.
뭔가 재미난 꿈을 꾼 것 같은데..
더 자고 싶지만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은 갈 곳이 있으니까요.
이불을 걷고, 침대를 박차고 나섭니다.
정성스럽게 이불을 갭니다.
베개를 이불 위에 올립니다.
음, 이정도면 충분히 깔끔해 보이네요.
실내화를 질질 끌며 거실로 나갑니다.
부엌에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엽니다.
생수를 한통 꺼내 뚜껑을 따고 마십니다.
집에 정수기가 있기는 하지만 며칠 전에 고장이 나 정수밖에 나오지 않아요.
저는 냉수를 좋아하기에 전날밤이면
미리 생수통에 물을 담아 냉장고에 넣어놓습니다.
어서 정수기 기사님이 오셔서 정수기를 고쳐주셨으면 좋겠네요.
생수통을 비우고 분리수거통에 넣습니다.
아직 반의 반도 차지 않았으니 다음주쯤에 분리수거를 하면 될듯해요.
샤워실로 가 찬물을 켜 간단히 세면과 양치, 머리를 감습니다.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립니다.
드라이기 바람 역시 차가운 바람이 좋습니다.
머리가 맑게 깨어나는 기분이에요.
머리를 다 말리고 옷장으로 향합니다.
오늘은 무슨 옷을 입어야 하려나..
하얀 양말을 꺼냅니다.
입습니다.
하얀 바지를 꺼냅니다.
입습니다.
하얀 반팔을 꺼냅니다.
입습니다.
하얀 니트를 꺼냅니다.
입습니다.
하얀 패팅을 꺼냅니다.
입습니다.
하얀 털모자를 꺼냅니다.
입습니다.
하얀색이 좋습니다.
하얀 사람이 된 것같은 느낌이 들어요.
흑인, 백인, 황인할 때 백인이 아니라,
말그대로 하얀 사람이 된 것같은 느낌 말입니다.
새 도화지처럼 새하얀 사람이.
누구를 만나도, 무엇을 겪어도 받아적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말입니다.
현관으로 향합니다.
벽에 걸린 헬멧을 손에 듭니다.
털모자 위에, 헬멧을 머리에 씁니다.
장갑을 낍니다.
거울을 보며 단정하게 몸에 얹은 것들을 정리합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허전합니다.
아참, 마스크를 쓰지 않았습니다.
어디다 뒀지?
아, 맞습니다.
전자레인지 안에 마스크를 두었습니다.
부엌으로 갑니다.
전자레인지 문을 열고 박스에서 마스크를 하나 꺼냅니다.
박스를 다시 전자레인지 안에 두고 문을 닫습니다.
다시 거울을 봅니다.
마스크를 씁니다.
이번엔 마스크를 내리고 웃어봅니다.
썩 그렇게 보기 나쁜 모습은 아닙니다.
다시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합니다.
집을 나섭니다.
복도에 기대어놓은 자전거의 자물쇠를 풉니다.
자전거를 끌고 엘레베이터에 탑니다.
일층에 도착합니다.
엘레베이터에서 내립니다.
대리석 바닥에 자전거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제법 듣기 좋습니다.
아파트 바깥에는 진한 회색빛 먹구름이 눈과 바람을 손수 뿌려주고 있습니다.
아직 가을의 끝물인줄 알았는데, 어느새 겨울의 초입에 다다라있었군요.
하얀 옷을 입기 잘한 것 같습니다.
뭐, 이 날씨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좋습니다.
제게 겨울은 언제나 행복하고 좋은 기억만 주는 계절이었으니까요.
포장마차의 어묵과 붕어빵, 따끈한 호빵부터 군고구마까지.
생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돌잖아요.
굳이 먹을 것에 한정짓지 않더라도 저기 봐봐요.
아가들과 그 가족들이 모여 눈사람을 만들고 있어요.
까르르, 들리는 웃음소리.
저까지 저절로 미소짓게 되네요.
조금 큰 아이들은 서로에게 눈덩이를 던져요.
눈싸움을 하나보네요.
겨울에만 할 수 있는 재밌는 놀이에요.
말하다보니 겨울은 참 특별한 것 같아요.
특별하다는 표현이 언제나 중요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겨울은 좋은 의미로 특별하잖아요.
잠시 자전거를 세워두고 저 가족들의 모습을 바라보기로 해요.
어라? 제가 신경쓰였는지 집으로 들어가네요?
조금 아쉽네요.
행복한 모습들을 더 눈에 담고 싶었는데..
뭐, 괜찮아요.
저도 가야할 곳이 있으니까요.
자전거에 올라타 패달을 열심히 밟아봅니다.

*

마스크로 입 주위까지 뭉뚱그려서 가려봐도
밖으로 조금씩은 희게 뿜어져 나오는 입김과 함께
해질녘, 빙판길 위를 행여라도 넘어질까,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다 보면
어김없이 그 거리가 나오겠지요.
맞아요.
저기 저 전봇대 옆 골목만 돌면 바로 보일 거예요.

그때도 오늘 같은 겨울이었는데,
하얀 겨울이었는데.

하얀 눈이 덮인 하얀 세상 속에서
철없이 자기의 빨간 색채를 떠벌리던 단풍나무가 쓰러져 있었지요.
채 자기 잎들을 계절에 맞게 떨어뜨리지도 못한,
아니, 떨어뜨리지도 않은 괘씸한 단풍나무가요.
베인 건지, 잘린 건지, 부순 건지.
아니면,
베여진 건지, 잘려진 건지, 부서진 건지.
누구의 짓인지, 아니, 무엇의 짓인지.
어쩌면 자연스러운 시간의 노쇠함 때문인 것인지.
저는 도저히 알 수도 없었고, 알 방도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몹시 당황했습니다
너무 당황해서, 감정이 고장나 눈물이 흐를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곧이어 당황을 덮을 만큼의 기쁨이
마음 속에서 뿜어져 나와
목젖, 입가, 두 눈, 얼굴 전체를 물들였습니다..
내심 예전부터 하얀 세상에 반항하던 철없는 단풍나무가 꼴 보기 싫었거든요.
자기가 뭐라도 된다는 듯한 태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기쁨, 그것의 출처가 머리인지, 가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뻤습니다.
새로운 기쁨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쓰러진 단풍나무의 주변을 맴돌고,
발로 쿡쿡 찔러보기도 하고,
떨어진 단풍잎을 주워보기도 하고,
나뭇가지 역시 몇 개 꺾어보기도 했습니다.

저는 한참을 그러다 일어나 손을 탁탁 털고는
단풍나무를 잡고 질질 끌면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꺾인 나무가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제게 돈도 두둑하게 주고요.
단풍나무를 그곳의 그에게 전해주고 돈 봉투를 받은 뒤에
저는 이곳에 다시 돌아와 나뭇가지와 잎,
그 외 나무의 흔적들을 깨끗이 지웠습니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 마냥 깨끗해진 이곳에,
하얀 눈이 새로이 이곳에 쌓였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무척이나 행복해했습니다.
하얀 겨울은 언제나 새하얀 것만이
자명한 사실이자 당연한 진리니까요.
새하얀 겨울 속에 사는 것은 새하얗게 물드는 것이 정설인데,
자기가 뭐라도 된마냥 그렇게 혼자 붉게 존재를 뽐내려하다니.
그러면 좋은가?
그러나 그러면 뭐합니까.
쓰러진 것도 단풍나무, 가져다 바쳐진 것도 단풍나무,
돈을 번 것은 단풍나무가 아닌 저였는걸요.

저는 그렇게 기쁘게 이곳을 떠났습니다.
눈아 더 내려라.
옴팡지게 쏟아져라.
하얗게, 하얗게 덮여라.
온통 뒤덮여라.
내 발자국과, 남겨질 자전거 바퀴 자국과,
혹시 내가 치우지 못한 단풍나무의 흔적들마저 모조리 가려지도록.
그 누구의 눈에도 담기지 못하도록.
그 무엇도 이곳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하도록.

후..
이제 골목이 점점 더 가까워집니다.
가슴이 뛰는 것이 기대감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골목을 돌기 전 잠시 심호흡을 합니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하나, 둘, 셋. 짜잔.

...

그렇게 들어선 거리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단풍나무가 있던 화단도, 그곳도, 눈도, 바람도, 그 아무것도.
마치 시간이 멈춰진듯합니다.
텅 비어있습니다.
공간도, 시간도.

저는 옆으로 쓰러지는 자전거의,
땅과 부닥치며 내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봅니다.
어떻게 된 걸까, 라는 단순한 호기심만 품에 둔 채로.

어쩌면 단풍나무는 처음부터 없었던 건가.
어쩌면 그곳은 처음부터 없었던 건가.
어쩌면 그 돈마저 없었던 건가.
어쩌면 그때 내가 겪은 눈과 바람, 겨울마저 거짓이었던가.

무언가가 이곳에 벌어졌던 것은 확실한데
벌어진 때가 제가 단풍을 치웠던 그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일 수도 그 전일 수도 그 후일 수도 있겠지요.
머리가 복잡해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집에 도착한 후에 천천히 생각들을 공책에 끄적이며 정리해야겠습니다.
공책에 글자들로 생각을 정리하고나면 의외로 쉽게 해답이 나온 적이 많았으니까요.

그렇게 쓰러진 자전거를 일으켜 세운 뒤,
바퀴를 끌고 다시 집으로 가려는데,
발견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 자전거의 검은 안장에 빨간 단풍이 묻어있습니다.
그때가 진실이었음을 알려주려고 그날에서부터 저를 따라왔나 봅니다.
저는 한참을 안장에 묻은 빨간 단풍만 바라봅니다.
입김도 불어보고, 자전거 안장을 분리해 흔들어도 봅니다.
그러다, 다시 안장을 조립합니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단풍을 대충 장갑 손등 부분으로 문질러 닦아냅니다.
집에 돌아가면 잊지 않고 장갑을 태우고 자전거 안장의 단풍도 마저 닦아내야겠습니다.

잠시 하늘을 바라봅니다.
지평선 끝부터 붉게 물드는 하늘..
붉게 물드는 하늘?
이런, 겨울이라 해가 짧아졌나봅니다.
벌써 하늘이 너울지기 시작한걸보니 말이죠.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도착해야 하니
서둘러 발걸음을 옮깁니다.
날이 추우니 다들 주의하세요.
한겨울 매끄러운 빙판길은 위험합니다.
여러분도, 저도 하얀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새빨간 단풍나무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새하얀 세상에 반항하는, 무식하게 새빨간 단풍나무로 말이지요.

지금, 이곳은 아직도 하얀 겨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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