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

단편

by 장순혁

광장.
군인들로 가득 차 있는 광장.
단상 위에는 양복을 갖춰 입은 남성이 서있다.
남성은 한동안 말없이 군인들을 둘러본다.
군인들과 눈을 마주친다.
정적으로 휩싸이는 광장.
우중충한 하늘에선 이내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고,
단상 위 남성에게 누군가 우산을 가져다 씌워주나,
양복을 입은 남성은 거절한다.
군인들의 철모와 어깨가 젖는다.
군인들처럼 양복을 입은 남성의 머리와 어깨도 젖는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
단상에 올려진 마이크를 툭툭 두들겨본다.
그러다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댄다.

"아, 아."

그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더니,
눈을 크게 뜨며 군인들을 바라봤다.
눈물을 참는 듯이 보인다.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분들께 우선 감사 인사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께도..
정말 감사합니다."

잠시 뒤로 물러나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남성.
다시 단상 앞에 선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전 군인이 아닙니다.”

회색빛의 구름은 제 몸을 조금씩 깎아내렸다.
구름의 조각들이 나란히 선 수많은 군복들의 색이
더욱 진해지도록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남성도, 군인들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궂은 날씨임에도 그들의 눈빛은 변하지 않는다.
회색빛 구름에서 회색빛 비가 내리는 것인지,
배경마저 회색으로 채워지는 듯 느껴진다.

“물론 여러분들 같은 전사도 아니죠.”

말과 말 사이의 정적을 빗소리가 채워주었다.
슬프도록 잔인하게.
어쩌면 구슬프게.
아니, 어쩌면.. 조금의 희망과 함께.

“저는 총으로 누군가를 쓰러뜨린 적도, 누군가를 지켜준 적도 없습니다.
아니, 총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 총의 무게와
대검, 탄창, 수류탄의 무게 역시 알지 못합니다.
박격포, 대공포의 무게도 역시 마찬가지로 모릅니다.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전투기가 쏟아낼 미사일의 크기도,
탱크가 쏘아대는 포탄이 터지는 소리도,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아니, 짐작조차도 감히 할 수 없습니다.
직접 들어도 감히 실감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군인입니다.”

군복을 입은 이들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철모에 물방울이 맺혀 뚝뚝 떨어졌다.
회색 소총들을 빗줄기들이 가로지른다.

“또한 전사죠.”

내리는 빗줄기가 점차 굵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군인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빗소리가 조금씩 커져갔다.

“여러분은 누군가를 쓰러뜨리고, 누군가를 지켜주셨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가 죽지 않게 등에 업고 달려본 적 있을 것입니다.
적의 몸에서 피를 흘리게 하고,
동료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주셨을 것입니다.
아프다는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버린 생명들을 보며
말없이 총을 손질하셨을 것입니다.
녹이 슬지 않도록,
불을 뿜을 수 있도록,
내일도, 누군가를 쓰러뜨리고 누군가를 지켜낼 수 있도록."

잠시 말을 멈추는 남성.
고개를 숙였다, 다시 들어올린다.
목이 잔뜩 메인 채로 말을 이어간다.

"종교를, 사람을, 상황을 믿지 않던 분들도
무언가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실 겁니다.
자신을 믿고, 동료를 믿고,
종교를 믿고, 언젠간 끝이 나리라고 믿게 되실 겁니다.
그러나 오늘도 잠에서 깨어나 보니 여전한 현실에 절망하실지도 모릅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집이 아닐까,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가족과 친구들은 괜찮을까.
복잡한 머리를 짚으며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이를 악물게 되실 겁니다.
하루살이가 된 것처럼 느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불을 향해 뛰어든다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내가 왜 이곳에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겁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총을 든다는 것에 의아해 하실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들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 모든 것들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어떤 뜻이 존재하기는 할런지,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빗줄기가 거세져도 그의 말은 반발이라도 하는 듯이 더욱 또렷이 들렸다.
어쩌면 그는 소리를 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분.
제 말이 끝나면 여러분은 나아가셔야 하시겠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삶과 죽음이 의미를 잃는 곳으로.
죽이지 못하면 죽는 곳으로.
오늘 죽지 않으면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마치, 마치 지옥과 같은 곳으로.”

군복을 입은 이들은 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떤 분은 겪어본 적 있는 지옥으로, 어떤 분은 겪어본 적 없는 지옥으로 가실 겁니다.”

그는 주먹을 굳세게 쥐고 말을 이어갔다.

“매일 총을 쏘고, 또 총을 맞고. 철모를 베개 삼아 배기는 흙 위에 모포를 깔고 잠에 드시겠지요.
하늘을 천장 삼아 별빛 아래 불편함 마음으로 잠을 청하실 겁니다.
끝없는 연민과 잔혹함 사이를 가늠하시면서 하루를, 또 하루를 버텨내셔야 할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
목숨의 무게란 이리도 가벼운 것이었나 회의감에 빠지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는 군복을 입은 이들의 모습을 한 명, 한 명 눈에 담으려 애썼다.

“새빨간 피에 익숙해지실 겁니다.
어쩌면 팔이, 어쩌면 다리가 사라져도 싸워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실 겁니다.
당장 옆에 있는 이가 다음 날이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여러분은 뼛속까지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쓰러진 동료에게서 인식표를 빼내어,
그 인식표의 차가운 냉기를 실감하게 되실 겁니다.”

그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침묵을 깨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

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들은 여러분의 그 숭고한 헌신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피부에, 뼈에, 심장에 새겨 놓겠습니다.
글로, 말로, 생각으로 여러분의 그 값진 희생을 전달하겠습니다.
그 누구라도 여러분들을 잊는 걸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말투에는 어느새 물기가 배어있었다.
빗물이 아닌 눈물로 가득 찬.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이름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한 분 한 분의 존재를 절대 지워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남기겠습니다.
찬란하게 빛이 나도록 매일 닦고, 또 닦겠습니다.”

그의 눈에 조금씩 눈물이 고였다.

“여러분이 지켜주실 소중한 내일을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새로운 내일을 희망차게 바라볼 수 있는 건 오직 여러분들 덕분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여러분이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시더라도 괜찮겠다고 생각하실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여러분이 목숨을 바치셔도 여한이 없을 나라를 만들고야 말겠습니다.
모두가 여러분들을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핏자국위에 새겨진 이 나라임을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니 여러분. 부디 두려움 없이 전진하십시오.
여러분이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굶주린 이들의 배를 채울 밭 한 마지기가 될 겁니다.
여러분이 흘리신 피가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한 식량의 양분이 될 겁니다.
여러분이 지켜주신 우리가, 전쟁이 끝난다면 우리가 여러분을 지키겠습니다.”

비는 점차 잦아들었고, 그의 말도 또한 작아져만 갔지만, 그의 말은 여전히 또렷이 들렸다.

“모든 일이 끝이 난다면,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마치고 난다면.
제가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난다면.
그제야 저는 비로소 여러분의 전우가 되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한 명의 군인이자 전사가 되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곁에서 당당히 어깨를 펴고 나란히 서겠습니다.
그때는 빗물이 아닌 따사로운 햇빛이 여러분들과 저를 적실 겁니다.
여러분들은 상처 입은 채 이곳에서 저를 바라볼 것이며,
저 역시 상처 입은 여러분들을 바라볼 겁니다.
어디 한 군데가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여러분들을 말입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여러분들과,
여러분들과 함께 저 역시 소리칠 겁니다.
기나긴 아픔이 드디어 끝이 났다고.
이젠 그 누구도 누군가를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지옥은 끝이 났다고.
이제 다시는 그런 걸 겪지 않으셔도 된다고.
평화라는 게 당연한 시대에 드디어 도달했다고.
우리는, 우리는..
이제 다 괜찮다고.
괜찮은, 괜찮을 날이 되었다고."

그가 마침내 눈물을 터뜨리며 마지막 말을 힘겹게 내뱉었다.

“부디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군복을 입은 이들은 다 같이 그를 향해 경례를 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마주하는 경례로 그들의 대답에 감사를 표했다.

군인들은 군화발 소리를 내며 어딘가로 향하고
그들의 얼굴에는 결의가 돋보였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굳은 결의가.

군인들로 가득했던 광장은 텅 비워지고
양복을 입은 남성만이 남아
군인들이 사라진 텅 빈 광장을 지키고 서있었다.
흠뻑 젖어버린 머리를 털어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흠뻑 젖은 양복을 입은 채로.
한참을.
한참이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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