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반복되는 남자

단편

by 장순혁

'지직'

집.
침실.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는 남자.
잠옷과 안대까지 갖추고, 고른 숨을 들이마시며 내뱉는다.

'지지직'

남자는 형광등을 환하게 켜고 자고 있는데,
깜빡거리는 형광등에선 이상한 소리가 난다.

'지지지직, 지직'

형광등은 점점 깜빡거리는게 심해지더니,
빛이 점점 밝아진다.

'펑!'

커다란 소리와 함께 형광등이 터져버리고,
남자가 덮고 있는 이불과 바닥에
유리 조각들이 쏟아져 내린다.

안대를 벗고 힘겹게 눈을 뜬 남자.
남자는 일어나 앉는다.
깨진 형광등 조각들로 가득한 주위를 둘러보다
아무렇지 않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한다.

"하암.. 음.."

'와직, 와지직'

남자는 깨진 형광등 조각들을 밟으며 화장실로 향한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다.
남자의 발로부터 시작되는 핏자국이 방에서 화장실로 이어진다.

"흠.."

칫솔을 꺼내 치약을 묻히고 양치를 시작하는 남자.
거울을 바라보면,
남자의 이마와 볼에도 형광등 조각이 박혀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러나 역시 개의치 않는 남자.
물고있던 칫솔을 변기에 버리고는,
수돗물로 입안을 헹군다.
팔을 걷고 세수를 하기 시작한다.
비누 거품을 내고 얼굴에 문지르더니, 비누 역시 변기에 버린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마친 남자.
잠시 멍하니 있더니 샤워기를 켠다.
잠옷을 입은 채로 물에 젖는다.
멍한 얼굴의 남자는 한참을 그러고 서 있다가,
이내 물을 끄고 수건으로 대충 얼굴과 머리를 털어낸다.
샤워기 역시 마찬가지로 변기에 버린다.

이상한 샤워를 끝마치고 남자는 부엌으로 향한다.
남자의 몸과 옷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
두 발의 핏자국은 점점 더 진해진다.
그러나 남자는 표정 하나 찡그림 없이,
내딛는 발 주저함 없이 계속 움직인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니, 익숙한 일인 것처럼.

부엌 싱크대 옆에는 책이 있다.
남자는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 읽는다.
그러다 질렸는지, 싱크대에 책을 넣어버리는 남자.
물을 틀고,
책이 젖는다.

남자는 찬장으로 손을 뻗어 커피잔을 꺼낸다.
그러다 커피잔 옆에 있던 유리 그릇을 손등으로 툭, 치고,
새하얀 유리 그릇은 떨어져 싱크대에 부딪힌다.
그 조각들이 깨지며 남자 손에 박힌다.
꽤나 깊게 박혔는지
남자는 처음으로 피 흐르는 상처를 바라본다.
그러나 이내 어깨를 으쓱, 하고는 만다.
뽑을 생각도 없는 듯 하다.

커피잔을 들고 거실 식탁 위의 커피머신으로 향하는 남자.
파란색 아메리카노와 빨간색 라떼 캡슐을 들고 서있다가,
파란색 아메리카노 캡슐을 넣고 커피잔에 커피를 내린다.

'위이잉'

방안을 가득 채우는 커피 향기.
남자는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남자의 거실 한쪽 벽면은 통유리로 되어있다.
커튼으로 덮여있는 창문.
남자는 거실 창문을 가린 커튼을 걷는다.
창밖은 아비규환이다.
피 흘리며 쓰러진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보이고 있고,
건물들은 모두 빠짐없이 불타고 있다.
하늘엔 검은 연기와 출동한 헬기들이 보이고,
사람들은 모두 비명을 질러대며 뛰어다니고 있다.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자.
남자의 무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커피가 모두 추출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켜는 남자.
남자는 창밖 풍경을 뒤로 하고
커피머신으로 가, 커피잔을 든다.
거실 구석에 있는 흔들의자로 향한다.

이제 남자가 흔들의자에 앉으면
의자가 부서지면서 남자는 뜨거운 커피를 몸에 쏟아버리고.
가벼운 화상을 입을 것이다.

"후우.."

한숨을 가볍게 내쉬는 남자.
흔들의자에 앉는다.

'끼익.. 끼이익..'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다시 흔들의자에 앉는다.

'끼이익.. 끼익..'

남자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황한 감정이 보인다.
의자가 부서지지 않았다.
남자는 몸에 커피를 쏟지 않았다.
잠시 멍때리던 남자.
의자에서 일어나 들고 있던 커피잔을 식탁에 올려놓는다.
남자는 의자를 살펴본다.

그러다 의자를 발로 차버리는 남자.
의자가 넘어진다.

의자를 들어올리는 남자.
바닥을 향해 집어던진다.
의자가 나동그라진다.

남자는 혼란스러워 한다.

내동댕이쳐진 흔들의자 옆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남자다.

"후우.. 후우.. 후우.."

남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쉰다.
두 눈을 쉴 새 없이 깜빡거리기 시작하고,
손톱을 세워 양 팔을 긁어댄다.
남자의 팔에도 핏방울들이 문득문득 새어나온다.
그렇게 방울지다 핏줄기가 될 무렵,

남자는 다시 흔들의자를 향해 손을 뻗는데,
그때 남자의 손에 박힌 유리조각들이 눈에 보인다.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얼굴과 발바닥, 손 등에 박힌 유리 조각들을
거칠게 강제로 뽑아버린다.
굳었던 피가 다시 터져나온다.
쓰라림이 남자를 덮친다.
그러나 남자는 개의치 않는다.

마른 세수를 연거푸해대는 남자.
남자의 얼굴 전체에 피가 번진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남자는 다급하게 창고로 향한다.

창고는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져있다.
주머니를 뒤져보는 남자.
그러나 열쇠는 들어있지 않다.

남자는 침실로 들어가 곳곳을 뒤져본다.
배개를 찢고, 이불을 털어본다.
매트리스를 뒤집어 엎어버린다.
그러나 침실에는 열쇠가 없다.

부엌으로 향하는 남자.
찬장 곳곳을 뒤지며 접시, 컵 등을 가리지 않고 쓸어버린다.

'챙, 챙! 와장창!'

접시, 컵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난다.
찾았다.
남자는 유리 조각 틈 사이에서 열쇠를 꺼내 든다.
창고로 향하는 남자.
그러나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인지,
열쇠가 잠긴 자물쇠 속에서 부러져버린다.

"씨발!"

욕지거리를 내뱉는 남자.
창고 문을 주먹과 발로 부서뜨릴 듯 때린다.
한참이나 그러더니 주먹과 발, 무릎에 피멍이 든다.

남자는 잠시 멈추고 무언가를 생각하고는,
부엌으로 가 칼을 꺼내온다.

칼의 손잡이 부분을 움켜잡고
자물쇠를 부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단단한 자물쇠는 열릴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반복하던 남자는
자물쇠가 걸린 경첩의 쇠부분을 바라보다,
칼끝으로 박힌 나사못들을 돌려 풀어버리기 시작한다.

'팅, 티디딩'

마지막 나사못마저 풀어버린 남자.
자물쇠를 뜯어버린 뒤, 칼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창고 안으로 들어선다.

망치, 빠루, 도끼, 쇠사슬..
철물점에서나 볼법한 물건들 사이에서
남자는 커다란 오함마를 꺼내든다.

오함마를 손에 쥐고 다시 거실로 나타난 남자.
흔들의자를 향해 다가가더니,
곧이어 흔들의자를 오함마로 내리친다.

'콰직, 콰지직'

흔들의자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남자는 계속해서 오함마질을 멈추지 않고,
곧, 남자에 의해 흔들의자는 박살이 난다.

산산조각이 나버린 흔들의자.
남자는 오함마를 내려놓는다.

주변의 흔들의자 파편들을 모으더니,
커다란 조각부터 마치 젠가처럼 쌓아 올리기 시작한다.

간신히 의자 모양으로 균형이 잡힌 흔들의자였던 조각들.
남자는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식탁으로 가 커피잔을 손에 든다.
그러나 이미 식어버린 커피.
남자는 벽을 향해 커피잔을 집어던진다.
깨지는 커피잔과 쏟아지는 커피.

남자는 찬장에 마지막으로 남은 커피잔을 꺼내
이번에도 파란색 아메리카노 캡슐을 골라
새롭게 커피를 내린다.

다시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
검은 구름이 몰려와 험상궂게 비를 뿌리고,
쓰러진 사람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타버려 거멓게 그을려진 건물들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굵은 빗줄기에 불길이 사그라들고있다.

그때, 저 먼곳에서 무언가 형체가 보인다.
남자의 집을 향해 다가온다.
낡은 망토를 뒤집어쓴 여자 아이다.
시체를 뒤적거리며 쓸만한 물건들을 찾는 듯하다.
남자는 창문에 가까이 다가선다.
손을 흔들어 본다.
여자 아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주변만 둘러보더니 떠난다.
점점 작아지다 사라지는 여자 아이의 뒷모습.
남자는 창문을 톡톡 두들겨본다.
손끝으로 톡톡 두들기더니 이내 그 힘이 거세진다.
주먹으로 창문을 박살낼듯이 두드린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집 안을 둘러보더니
오함마를 들고와 창문을 향해 휘두른다.
그러나 창문은 깨지기는커녕 조금의 실금도 가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오함마의 나무손잡이 부분이 부러진다.
창문을 향해 잔해들을 집어던지는 남자.
창문은 여전히 멀쩡하게 던져진 것들을 튕겨낼 뿐이다.
튕겨나온 오함마의 해머 부분이 남자의 발등에 찍힌다.
그러나 어떤 신음도 내뱉지 않는 남자.

남자는 뒤돌아 다시 집안을 둘러본다.
엉망이 된 침실과 난리가 난 부엌, 피로 물든 거실까지.
그러나 남자는 역시 무표정이다.

'커피가 모두 추출되었습니다'

남자는 커피잔을 들고
흔들의자였던 것을 향해 걷는다.

처음으로, 남자는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절룩거리며 흔들의자를 향해 가는 남자.
남자는 흔들의자였던 것에 앉는다.

어설프게 쌓여있던 흔들의자의 파편들이 무너져내린다.

남자는 넘어지며 커피를 몸에 쏟는다.

잠옷 너머로 뜨거운 커피가 몸에 달라붙는다.

화끈거리는 배와 가슴의 화상을 느끼며
남자는 소리치듯이 웃는다.
미친 사람처럼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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