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신문고란 행정의 민주화와 신뢰성을 향상시키고 국민들이 가장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행정구제의 수단>이라고 국민신문고 홈페이지에서 자기를 거창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국민들이 궁금한 거? 화난 거? 신기한 거? 바라는 거? 를 적으면 담당 부처의 담당자들이 읽어보고 해결책을 적어 답장을 보낸다. 즉 국민과 공무원들의 비대면 소통 방식이다.
국민신문고 질의 답변 작성은 그동안 모성보호에서 팀장님 격인 짬 있는 w주무관님이 처리해왔다. 15년 넘는 짬이 있었지만 w주무관님도 국민신문고를 처리할 때는 거의 반나절은 실무업무를 하지 못하고 답변 작성에 몰두하셨었다.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지만 신중을 기하셨다.
예전에 친구가 국민신문고에 질의를 보낸 지 5개월 만에 답을 받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답변은 결론적으로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안된다'는 말은 없지만 '안 된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단어와 어구들이 A4 한 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다 읽고 나면 '안 된다'인데 글 중에 '안 된다'는 어구는 없었다.
친구랑 같이 읽으면서 그게 너무 신기했다.
분명 w주무관님도 '안 된다'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안 된다'는 말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저렇게도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스치듯 해봤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안 된다'를 '안 된다'라고 쓰지 못하는 '고난도' 글쓰기는 자유로운 영혼의 나에겐 생각만 해도 가슴이 컥컥 막히며 절대 내가 할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런 '극한' 글쓰기 업무가 나에게도 배정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호기로웠다. W주무관님께 "저는 정중하게 쓰되 쉬운 언어로 핵심을 확실하게 전달하는 글을 써 보겠습니다. 그동안의 국민신문고 답변 틀을 깨 보겠습니다. "
w주무관님이 국민신문고 기본 틀 한글파일을 보내주셨다. "그냥 틀에 맞춰 쓰는 게 네가 편할 거야."
"본인 회사에서 매달마다 주는 oo수당이 통상임금이 됩니까?"가 민원인의 질문요지였다.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사업장에 임금 규정을 보내달라고 한 후 조사해서 통상임금이 되는지 안 되는지 적어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과정이 복잡한 것도 아니었다. 즐겁게 나의 첫 '국민신문고 작성'이라며, 그리고 틀을 깨 보겠다는 생각에 신나 있었다.
02로 시작되는 번호를 톡톡 누르며 사업장에 전화를 했다. "국민신문고 질의에 대한 통상임금 조사를 위해 급여 규정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 보통이면 "팩스로 지금 보내드릴게요."인데 이번엔 '국민신문고'라는 말이 붙자, 사업장의 태도는 달라졌다.
"자료 제출 공문을 보내주세요"라고 했다. 심지어는 그 해당 직원의 '국민신문고' 취하를 사업장에서 종용해보겠다고도 했다. 짧은 생각에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제가 조사하고 취하할 상황이라면 직접 민원인에게 전화를 하겠습니다."라고 전화를 끊었다.
묵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해당 사업장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보니 한참 통상임금 소송 중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이 사업장(한자만 말해도 다 앎)은 이미 특정 지사에선 00 수당에 대해 통상임금 승소를 한 경우도 있었다. 서울에 본사가 있는 사업장이었지만 해당 사업장의 직원이 내가 관할하는 지역에서 육아휴직급여를 받았기 때문에 질의가 나에게 들어온 것이었다.
'헉, 이건 아닌데, 미쳤다" 입 밖으로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10개월 차 신규공무원이 쓴 하나의 국민신문고가 전국의 수천 명 직원의 통상임금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순간 나의 호기로움은 사라졌다. "이걸 이송해야 하나?"라는 쉬운 방법도 한 줄기 빛처럼 지나갔다. 유튜브에서 본 충주시 공무원이 올린 영상도 생각이 났다. '공무원은 왜 전화를 돌리는가'. 깔깔대며 영상을 봤었는데 현실이 되니 그 영상 속 공무원이 말했던 것이 모두 진실이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래 본사가 있는 서울로 이송할까? 아니다 통상임금 판단인데 우리 지청 근로감독과로 이송할까? '
답변 쓰기를 피하기 위한 생존 전략들이 머릿속에서 빛의 속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결론은 늘 그렇듯 ENFP의 방식대로 그냥 '내가 하자'는 거였다. 피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보단 내가 처리하는 계획을 세우는 게 더 행복할 것 같았다. 자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에게 왔다.
사업장은 공문을 받고도 하루 동안 회의를 해야 한다면서 규정을 보내주지 않았다. 다음 날 규정을 보내왔고 나는 사안이 중대한 만큼 규정의 세부규정까지 요청했다. 그리고 해당 사업장의 인사 급여 담당 C차장님은 oo수당이 절대 통상임금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낮은 톤으로 차분하게 설명을 해 주시면서 한참 후에 나머지 규정도 보내주셨다.
나는 옆 주무관님에게 "저 주무관님 그 국민신문고 틀 다시 한번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어제 보내주신 거 저장을 안 해놔서 부탁드려요. 그리고 틀을 깨지 않고 최대한 틀대로 써 보겠습니다."라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한 채 말했다. w주무관님은 "그래 머리 묶고 규정 분석해봐 봐."
하루는 자료 요청 공문 쓴다, 전화한다, 틀을 깨 보겠다, 막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실무는 하나도 못하고 국민신문고에 집중했다. 그런데 한 줄도 못쓰고 하루가 갔다. 둘째 날 오후, 우여곡절 끝에 자료는 다 도착했고 쓰기만 하면 됐는데 '국민신문고' 답변, 그 한 줄의 의미를 알아버린 후라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또 하루가 끝났다.
주말에 회사에 나와서 '국민신문고 답변 쓰기'에 다시 집중했다.
첫 번째의 산 : 00 수당은 통상임금인가?
해당 사업장의 00 수당은 통상임금이 아닌 게 명확했다. (여기서라도 이렇게 쓰니 속이 시원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렀음) 사업장은 대기업인 만큼 급여 규정에 세밀하게, 꼼꼼하게, 명확하게 통상임금이 될 수 없음을 명시해놓았다. 특히 몇 차례의 비슷한 소송을 겪으면서 연도별로 규정들을 개정도 했다. 최소한 지금의 고용노동부의 지침으로 판단해보면 그렇다. 법원에서 개별 사건으로 판단을 받기 전까진 변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두 번째의 산 : '안 된다'라는 것을 절대 쓰지 않으면서 논리적으로 '안 된다'라고 느껴지게 쓰기. 가능?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장착한 사람으로 그냥 글쓰기가 아니라 '자유로운 글쓰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국민신문고 답변'은 내 의견을 넘어 고용노동부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어깨가 무거워진다는 말이 뼛속까지 들어온다.
현재 겨우 초안은 쓴 상태이다. 그리고 팀장님 소장님의 결재를 통과해야 한다. 나는 해낼 수 있을까. 이 '극한'의 글쓰기에도 끝은 있겠지. 공무원 시험공부를 할 때 좀 지친다는 생각이 들 때 '옥상달빛의 달리기'를 들었다.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창피하게 멈춰 설 순 없으니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그다음 가사는 지금 흐름상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거라 아예 바라지도 않는다. ㅎㅎ 여하튼 나의 모든 정신과 육체를 집중한 국민신문고 답변 쓰기는 오늘도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