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4일
6년 전 배낭여행은 시간 강박이 있던 나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과거의 나는 남과의 약속이든 나와의 약속이든 시간 약속은 철저히 지키고 무슨 일 이든 계획대로 되지 않는 하루를 싫어했다. 그 날 약속이 있으면 몇 시에 일어나서 몇 분간 샤워를 하고 몇 분간 준비를 할지, 무슨 옷을 입을지 전 날 미리 다 계산해서 당일 날 로봇처럼 움직였다. 나 자신조차 계획적인 삶에 만족하고 시계가 없으면 불안한 삶을 살았다.
우리 아빠는 나와 성격이 비슷하다. 내가 여행을 가기 전에 일정을 자세하게 표로 만들어 제출하면 여행을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성격이 똑같은 나도 시간 일정을 빡빡하게 세운 표를 만드는 것을 즐겼고 그렇게 3개월의 일정을 다 만들어서 허락을 맡았다.
첫날은 홍콩에 저녁 7시에 도착해서 8시에 하는 심포니 오브 라이트라는 불빛쇼를 보고 야경을 구경하고 숙소를 가는 일정이었다. 내가 이걸 아직까지 다 기억하는 이유는 홍콩은 1박 2일 일정이라 야경을 볼 수 있는 날이 그 날 하루밖에 없었고, 8시에 시작하는 불빛쇼를 보려면 어떤 버스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 철저하게 조사했기 때문이다. 배낭여행이라 기간도 길었고 굳이 2일만 머물 필요가 없었는데도 나의 시간 강박은 이런 식으로 나를 압박했었다. 내가 가진 이 만큼의 홍콩달러로 2일 동안 이러이러한 곳에 쓰겠다는 대중교통의 금액까지 다 조사해서 계획을 세웠었다. 출국 당일, 비행기가 지연이 됐다. ‘도착해서 짐 찾고 빨리 뛰어가면 중간부터는 볼 수 있을 거야’. 버스를 탔는데 길이 또 막혔다. 그 무거운 짐을 메고 한 겨울에 땀이 나게 뛰었지만 내 눈 앞엔 불빛쇼가 끝나 여유롭게 산책 중인 사람들만 보였다. 그러고 힘 없이 센트럴이라는 곳으로 갔다. 휘황찬란해서 홍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인 센트럴. 거리 전체에 루이비통, 샤넬, 롤렉스 매장으로 쫙 깔려 불빛에 눈이 부셨던 그곳에서 큰 백팩을 메고 추리닝을 입고 있는 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착하고 5분도 안돼서 숙소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계획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구나’. 도착 첫날 깨달은 나는 공들여 만든 계획표를 찢어서 버렸다.
다음 날 중국 심천에서 친구가 사는 난닝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춘절 기간이라 비행기, 버스, 기차 다 없었는데 여행사 다니는 친구의 도움으로 난닝 가는 비행기표를 구할 수 있었다. 심천 공항에 도착 해 발권을 하려는데 발권을 할 수 없는 여권이란다. 무슨 소리냐 하니 내 여권은 영문 이름으로 되어있는데 중국인 친구가 예약해 준 건 중국어 이름으로 되어있어서 신원을 확일 할 수 없단다. 우리나라처럼 국내선은 한글 신분증 만으로도 발권이 되기 때문에 중국인 친구도 익숙하게 그냥 내 중국어 이름으로 발권을 해 줬던 것이다. 급하게 주위 사람의 폰을 빌려 친구한테 연락 한 다음에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는 기차로 다시 예매를 했다. 정말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배낭여행이 끝나고, 여전히 계획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어차피 계획해도 안 될걸 알기에. 일생의 잠깐 뿐이었던 여행이 이렇게나 나를 바꿔 놓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에야 생각하지만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그런 여행을 했었던 것이 정말 다행이다. 그때의 무계획 여행은 그 나이의 무모함으로만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계획 없는 여행을 하고 있지만 그때만큼 아찔함과 역동적임은 확실히 덜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