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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혜이 Sep 29. 2021

날씨와 겸손

   이웃집 쌍둥이 중 한 명은 언제부턴가 아침마다 엄마와 함께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간다. 책가방을 맨 아이의 뒷모습과 아무것도 등에 메진 않았지만 어깨가 무거워 보이는 아이 엄마의 뒷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발 붙이고 선 자리에서 구경한다. 그러면 곧 이웃집 아저씨와 두 명의 아이들이 집 앞 스쿨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온다. 좋은 아침이야,라고 우리 모두는 서로를 위해 합창하고 스쿨버스가 들어오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려 선다. 아저씨가 날씨 좋다, 이런 날은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어,라고 말한 순간 맑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악, 괜히 말했어. 우리는 큰 소리로 웃다가 자전거를 타고 떠난 두 사람 걱정을 했다. 다행히 비는 금세 그쳤고, 아이들은 떠났고 우리는 또다시 날씨 앞에 겸손히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마 전 이웃집 아저씨가 우리가 알게 되고 나서 처음으로 긴 팔 츄리닝을 입고 나와 겨울이 오고 있어, 하길래 조용히 왕좌의 게임 스타크 가족을 생각했다. 어쩐지 아저씨의 목소리가 얼음 깨물어먹는 소리같이 들려왔다. 너네는 몬트리올에서 살았으니까 눈에 익숙하겠다. 그렇지, 그런데 뉴저지에 오래 있어서 이젠 우리도 어떨지 몰라. 내가 눈 치워주는 사람 소개해줄게. 고마워. 겨울이 오고 있다고. 삽질만큼 사람을 겸손하게 하는 일도 없죠, 라는 말은 미처 하지 못하고 나는 만약에 사람의 영혼이 사는 계절이 있다면 그 계절이 겨울일 것 같다고 오래전 내게 편지한 사람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졌다. 오겡끼데스까. 와타시와 겡끼 데스.  저기, 아니, 네가 영혼이 살 것만 같다던 그 계절에 난 애를 둘이나 낳았다고.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식구들은 다 겨울에 태어났다. 벚꽃엔딩이 시작해서 안티프리즈가 완성시킨 사람들. 봄바람 휘날리며 흔들리는 벚꽃잎이, 임신. 우리 둘은 얼어붙지 않을 거야. 바닷속의 모래까지 녹일 거야, 출산. 주먹을 쥘 수도 없을 만큼 추운 날에 애를 낳으러 가는 길처럼 사람을 겸손하게 하는 길은 없죠. 당신 혹시 이등병의 편지를 들먹일 예정인가요. 어쩌면 겨울은 인간의 영혼을 파멸로 모는 계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의 가을은 낙엽 대신 솔방울이 발에 차인다. 학교 가는 길에 눅눅한 솔방울을 징검다리 건너듯이 밟고 지나가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그만 아이들이 입꼬리를 내렸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나는 애들이 학교 끝나고 올 때쯤에는 솔방울이 햇볕에 바짝 말라있을 거라 말했는데 오늘은 하루 종일 천둥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수시로 내리는 날이었다. 악, 괜히 말했어. 이웃집 아저씨를 떠올리며 나는 스쿨버스에서 내릴 아이들을 데리러 우산 없이 비를 피해 머리를 조아리며 가는 길 내내 겸손히 괴로워했다. 스쿨버스보다 먼저 자전거를 타고 쌍둥이 여자 아이 한 명과 엄마가 그들의 집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한 손을 번쩍 들어 나에게 인사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과연 기다리기보다는 헤쳐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스쿨버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네 명의 아이들 중 나는 두 명을 알맞게 골라 함께 젖은 솔방울을 발로 차며 집으로 돌아왔다. 비 내린 아스팔트에 솔방울 구르는 소리가 낙엽 소리 못지않은 우르릉 쾅쾅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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