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너무 사랑한다, 근데 가끔은 너무너무 힘들다.
낯선 장소, 낯선 침대 위에서 꼬물대며 나를 바라보는 너를 바라본다. 너는 나를 바라보며 배시시 웃는다. '아우웅, 아우우'. 그러다, 갑자기 또 울음을 터뜨린다. '크아아앙~, 크아아아아아앙!'
오스트리아 빈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나와 아내는 7개월 된 아기를 돌보며 빈에서 생활했다. 한국에서는 이유식도 한번만 먹었는데, 아내는 이제 중기로 넘어간다면서 이유식을 두번씩 먹이는 육아 스케줄을 진행했다.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초반에 가족 모두가 순차적으로 감기에 걸렸을 때도 힘들었고, 중반쯤 지나서 며칠 동안 잠을 안 자고 계속 울어댔던 우리 둥이 때문에도 솔직히 힘들었다.
아기는 왜 우는 걸까? 멍청한 질문인가 싶지만 정말 궁금했다. 너무 당연한 거지만 배가 고프면 운다. 쉬나 응가를 해도 불편하니까 운다. 잠을 자고 싶어도 운다. (처음엔 이게 참 당황스러웠다. 잠을 자고 싶은데 왜 우는 걸까? 울면 더 힘들고 자기 어려울 텐데 싶었다. 태어난 지 몇 개월 된 생명체에 어른의 기준을 대입하는 멍청한 어른이 바로 나였다.) 그다음에 당연히 아프면 울 것이다. 여기까지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아기가 울면 바로 체크해 볼 사항들인 것이다. 분유 먹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지, 졸린 신호(눈가를 비비는 것이 가장 첫 번째고, 움직임이 둔해지는 등의 몸짓 언어가 있다.)가 있는지 혹은 어디 다친 곳이나 아픈 데가 있는지 챙겨봐야 한다.
그런데, 내가 제일 힘들게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자야 할 시간에 잠을 자지 않고 우는 것이다. 빈에서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분명 잠을 자야 할 시간인데 운다. 그것도 강성으로 운다. 솔직히 옆집 현지인들이 아동 학대로 신고하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큰 소리로 울었다. 자야할 때 안 자고 우는 것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이유들이 작용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나도 모르겠네요.'라는 것이다. 유일한 해결책은? 안고 달래주는 것이다. 쉬~ 소리가 나는 음악을 틀고, 온도를 적정하게 맞춰놓고 하는 등의 환경적인 요소들은 당연히 점검이 끝난 상황이니 그 상황에서 오직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따듯한 체온을 느끼게 꼭 안고 토닥여주는 것뿐이다. 그렇게 편안하게 안아줘야 하는데, 문제는 내가 편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빈에서 둥이가 울던 그날도 나는 그 울음소리를 견디다 못해 둥이를 번쩍 들어 올렸고, 아내는 기겁을 하며 둥이를 데려갔다.
남자가 아기 울음소리에 더 취약한 것일까? 궁금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이것저것 찾아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전통적으로 여성이 주 양육자가 되는 것이 전 세계 공통이라 볼 수 있다. 여성의 뇌신경체계는 남성보다 아기 울음소리에 더 즉각적이고 강하게 반응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남성이 공동 or 주 양육자가 되면 남성의 뇌도 점진적으로 아기 울음에 민감해지는 신경학적인 적응을 보인다고 한다. 울음소리에 민감해지는 것은 남녀 모두 비슷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응은 또 양자가 다르게 나타난다.
결정적으로는 호르몬 시스템의 차이이고, 그 호르몬 시스템의 차이의 발현은 수십만 년에 걸친 인류 진화 과정의 결과라고 한다. 장구한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종족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여성은 외부의 위험에 직접적으로 맞서기보다는 자녀 보호를 위해 본능적으로 아이를 품고 조용히 보호하거나 동료 여성들과 협력하려고 했고, 남성은 위험 상황에서 빠른 결단을 통해 적과 싸우거나 혹은 도망치는 것을 선택해야 했다. 그래서 남성은 'Fight or flight' 전략을, 여성은 'Tend and befriend' 전략을 본능적으로 택해서 진화해 왔다. 이 과정에서 남성은 테스토스테론, 아드레날린, 코르티솔 등 즉각적인 결단과 위협에 대한 반사적 행동에 치중한 호르몬이, 여성은 옥시토신, 에스트로겐 등 정서적 유대와 돌봄, 공감 능력을 강화하는 호르몬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구구절절 길게 늘여서 변명해 봤지만 누구나 다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아내와 '공동' 주양육자 포지션을 점하고 있고, 아내보다 월등히 울음소리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 정서적, 감정적 스트레스에 더 취약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본능적 반응이 나를 더 죄책감에 빠져들게 한다. 너는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는데, 조그마한 너에게, 나에게 의지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너에게, 나는 왜 짜증과 화를 내는 것일까.
우리 둥이는 정말 너무 사랑스럽다. 기저귀를 갈고 로션을 바르면서 아기의 보드라운 피부를 매일 쓰다듬고 만진다. 아기의 살 냄새를 맡는다. 손가락 냄새, 발가락 냄새를 맡는다. 머리 냄새도 맡는다. 미쉐린 타이어 같은 통통한 허벅지와 궁둥이에 뽀뽀를 한다. 아침에 졸린 눈을 깜빡 깜빡이는 너를 안고 오늘도 사랑한다 사랑한다 수없이 속삭인다. 분유를 먹이고 소화시키기 위해 너를 안고서 눈을 마주치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바닥 매트에 누워서 기어가다 내가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 보고는 나를 향해 환히 웃어주는 너를 보며 나는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과 애착의 감정이 너무 크다 보니 그 부담으로 잘해야 한다는 압박도 강하게 느끼는 것 같다. 둥이 신생아 시설 산후조리 도우미분이나 주변 다른 분들이 '남편이 애를 정말 잘 돌본다'라고 말한 적이 꽤 있었다. 나름 보람도 컸고 잘한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상황은 급변한다. 짜증이 솟구치고 어찌할 줄 모르게 된다. 악을 바락바락 쓰며 우는 아기가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게 울다 겨우 잠재우고 나면 죄책감에 휩싸인다.
아내와 공동육아 휴직이 아니었다면, 내가 주양육자가 되는 것을 경험하지도 못했을 테고, 이런 경험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많이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기다리고 있었던 삶의 단계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는 일반적인 삶의 양태를 다 겪어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결혼과 자녀 양육이란 것도 포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제 자녀 양육의 단계에 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힘들어도 이 시간도 곧 지나갈 것이다. 다들 그러지 않는가. 애기 때의 귀여움으로 평생 효도를 다 한다고. 물론 아직 짜증 내고 화가 날 시간들이 더 많이 생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기는 보통 3~4살 이전의 경험들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갓난아기 때의 기억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자녀와 부모 모두에게 삶은 고통이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시기의 기억은 보통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시기 형성된 부모 자식 간의 애착과 정서적 유대감은 자녀의 무의식에 흔적을 남겨 평생 간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이다. 나는 지금 아내와 공동육아 중이고, 내가 힘들 때면 곧바로 아내가 둥이를 안아 들 수가 있다. 부정적 경험은 최소화하고 사랑은 최대한으로 주려고 노력하자.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씩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말 귀엽기에, 둥이가 기어 다니기만 해도, 바라만 봐도, 미소만 지어도, '귀엽다'란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부족한 아빠이지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단다 둥이야. 가끔 너의 무한 울음에 정신줄을 놓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게 처음 겪는 일이라서, 초보 아빠라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렴.
There are only two ways to live your life. One is as though nothing is miracle. The other is as though everything is. - Albert Einstein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삶에서 중요한 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라고. 그냥 평범한 하루하루 일 수도 있고, 모든 순간이 기적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바라볼지 선택하는 것이다. 내게는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기적이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배냇저고리에 쌓여있던 3.5kg의 작은 신생아가, 이제 열심히 바닥을 기어 다니고 나를 마주 보며 환하게 웃어주기도 하는 7개월 차 아기가 되었다. 우리네 삶은 모두 기적이다.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기적이고, 우리의 만남이, 우리의 인연 또한 모두 기적이다. 아내와 같이 둥이 너를 키우겠다고 육아휴직을 신청했던 과거의 나의 선택도 기적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만나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이 글을 읽는 독자도. 모든 것은 기적이다. 앞으로 또 어떤 고난이 닥칠지, 혹은 어떤 행복이 펼쳐질지 모른다. 그래도 모든 하루하루 모든 순간순간이 기적이라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자지 않고 '크앙 크앙' 우는 너도 내게는 기적이다. 우는 너를 안고 있는 그 순간조차 행복이다. 이 모든 순간이 찰나임을 이젠 알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포기한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 모습 그대로의 나와 너를 받아들인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도록 노력할 것이다.
너와 나, 우리의 모든 기적을 축복한다. 사랑한다 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