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0살 때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절대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
엄마 아빠를 보며,
저렇게 애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애를 낳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학력을 자랑하는 엄마아빠는 그 생각을 왜 하지 못 했을까요?
그렇게 머리들이 좋아서 좋은 대학 좋은 대학원을 나와 놓고
그저 공부에 집중 못한다고 늘 후려쳐지는 저보다도 그 생각을 못 한 걸까요?
그 시대에는 다들 낳으니까?
애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낳았을까. 저는 늘 이게 궁금했습니다.
어릴 땐 감히 물어볼 엄두도 못 냈습니다.
이미 여러 번 성모자애원에 보내버린다고 협박을 들은 터라 정말 거기서 살게 될까 봐 무서웠거든요.
한 바탕 폭력이 휩쓸고 갑니다.
저는 두들겨 맞고 억울해서 울고 말대답하다 내쫓기고 지쳐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취급을 당했는지 도저히 이유가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이제 엄마는 기분이 풀렸습니다. 아빠가 자기편을 많이 들어줬나 봅니다.
저보고 이리 와보라고 합니다.
그러곤 갑자기 “한 번 안아보자.”라고 합니다.
저는 너무 지쳤습니다.
엄마의 저렇게 얼르는 말을 들어주는 걸로 오늘의 고된 하루를 끝낼 수 있다면 끝내고 싶습니다.
저를 안아주며 엄마가 말합니다.
“사랑한다. 때려서 미안해.”
저는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계산을 시작합니다.
‘저게 무슨 뜻이지?’
저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일단 오늘 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씻고 제 방으로 돌아갈 수 있기만을 기다립니다.
오늘도 하루가 끝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저러다가도 새벽에 또 쳐들어 올 수 있습니다.
저는 24시간 단위의 하루가 아닌 시간 단위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꽤 오랜 기간, 어쩌면 현재까지도 저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연인 간에, 가족 간에, 친구들 간에 그런 애틋한 감정들을 표현하는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흉내를 냅니다.
아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아껴주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거나 안아주는 거구나.
제가 같이 자랐던 강아지를 사랑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 감정이 사랑이라면 사랑이 뭔지는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강아지와 나누었던 감정을 엄마 아빠와는 나눠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그들은 저를 사랑한 게 아닌 것 아닐까요?
제가 강아지를 예뻐하면 엄마는 핀잔을 줍니다.
“개가 그렇게 예쁘니?”
이건 그냥 질문이 아닙니다.
분위기 파악을 잘해야 합니다.
어릴 적 저는 한 번도 “그럼 예쁘지.”라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랬다간 어느 순간 또 다가올 먹구름의 그림자가 강아지에게 까지 미칠게 뻔하니까요.
저는 엄마 앞에서는 강아지를 놀리는 척하고,
방에 강아지랑 둘이서만 있을 때, 맘 졸이며 예뻐해 줬습니다.
엄마가 언제 쳐 들어올지 모르니 맘을 항상 단단히 먹고 있어야 합니다.
그 강아지가 이제 노견이 되어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한참 후 저는 다른 개를 데려오게 됐습니다.
처음엔 그 개에게 마음을 나눠주지 못하던 저는 결국엔 새로운 개에게 마음을 주게 됐습니다.
엄마는 그때와 똑같은 핀잔을 줍니다.
“개가 그렇게 예쁘니?”
성인이 된 저는 처음엔 주춤합니다.
늘 하던 대로 엄마 앞에서는 개를 놀립니다.
그러다가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이 개를 좋아하는데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건가?
“엄마는 왜 내가 동물들을 예뻐하면 그렇게 말해?”
엄마는 대답합니다.
“뭘? 그냥 예쁘냐고 물어보는 건데?”
엄마는 내가 감정 표현도 할 줄 아는 존재가 됐다는 것을 깨닫고 한 발 물러섭니다.
그 뒤로 저는 개가 예쁘면 예쁘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타박주는 것 말고도 다른 애정방식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적어도 동물에게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