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나는 문장들

처방문장.

by 윤지WORLD

어떤 문장들이 있다.

찾아 나서지 않아도 때마침 나타나는 문장들이다.

어느 책장에 조신하게 덮여 있다가 기다렸단 듯이 날개 펴서 폐부를 찌르고 날아드는 구절들.

기막힌 적기에 우연히 발견되는 그런 문장들을 접하면 나는 소름이 돋아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온 우주의 기운이 도와 이 책 앞으로 나를

인도했다느니

빛나는 탄탄대로를 예언하는 복선이라느니

활자 위를 걷는 기분이라는 둥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조증상태가 아니었나 싶은 순간들이다.

날개를 접어 책장에 꽂고 세상을 얻은 듯 득의양양하게 다시 삶으로 나아가면 놀랄 만큼 나의 삶은 조금의 변화도 없는 결말.

나는 이 스토리에 아주 익숙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시적 환각을 찾아 틈만 나면 서점으로 도서관으로 나타나는 문장을 처방 받으러 갔다.

19000원 정도면 출판문화의 꽃도 피울 겸 합리적인 진료비가 아닌가 하면서.


나의 오늘이 내가 살아갈 미래라는 말에 동의하는 나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지 십년이 넘어 가는데

효력이 있는 건지 특별히 전문의를 찾는 일 없이 아직 망하지 않은 정신으로 무탈해 보이는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다만 때때로 삐걱거림은 있는 채 계속되는 삶이다.

오늘도,

어딘가 고장난 듯하여

내 경험치만큼의 신뢰가 있는 처방문장을 찾아 서점으로 떠났다.

오늘도,

나타나는 문장이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닌 지금 나는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

맹자의 말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책이었다.

(니체->쇼펜하우어->맹자

어쩌다 나는 이 순서로 읽게 됐는데 출판업계가 어딘가 고장난 현대인들에게 내미는 고전 독서 패턴인가 싶다.)

저자가 건넨 저 문장이 내 쿠크를 후벼판 이유를 지금의 나는 달리 해석한다.

우주의 기운일 리 없고 예언기능을 탑재했을 리 없는 활자가 나를 고조시키는 까닭을 이젠 이렇게 이해한다.

무탈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지나가는 숱한 감정들 가운데 거슬리는 감정이 있다.

근데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어 그것들을 고려하기를 포기한다.

그렇게

내재돼 있는 채로 덮어 짐짓 모른 척 두는 감정들.

처리되지 못한 감정은 자연소멸 되거나

된 척하다가 먹이를 주면 문다.

그런 때,

나타나는 문장들인 것이다.

아직 때가 아닌 지금 나는 어떻게 있어야 하는가.

근래까지도 나는 좀체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나의 열망에 대해 다소 화가 나 있던 것 같다.

그러나 먹고사니즘에 집중하고 내면의 평화에 밀려

덮어두고 자연소멸을 주문했다.

소멸된 척하며 기회를 보던 감정들이 저 문장덕에

나에게 고려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해서 난 처방문장을 받고 해볼 만한 고려를 해 보려 한다.

아직 때가 아닌 내가 어떻게 지금을 있어야 할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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