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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이 된 남편

나, 채식주의자 주인공 되는 거야?

by 따뜻한 선인장 Mar 0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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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돌아왔다.

20시간을 꼬박 날아와서 나는 엄마가 있는 집에서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아부다비를 거쳐 취리히에서 다시 독일까지, 두 번을 경유한 비행기 안에서 나는 총 3번의 기내식을 먹었다. 언제나 그렇듯 먹을 땐 나름 맛있게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면 먹은 게 없었던 것처럼 헛헛한 뱃속이었다.


남편은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날, 내 도착 시간이 아침이기 때문에 배가 고플 테니 어떤 음식을 준비해 두면 좋겠냐고 물어봤었다. 오랜 고민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내가 한국에 머무는 2달여의 시간 동안, 남편은 채식으로 식단을 바꿔봤으며 앞으로 가능한 한 채식 식단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 집에 오면 뭐 먹고 싶어?

한국 음식을 직접 해보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식의 가장 중요한 밥을 짓고 그다음 반찬들을 만들다 보면 내가 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 비건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물과 오일, 소금이나 간장으로 간을 하면 외국인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비건 반찬이기도 했지만, 문제는 남편이 한국인이 아니라는 점. 남편이 만드는 비건 음식이 어떤 음식일지 아직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하나 둘 친절하게 불러주는 식단의 재료들을 듣다 보면 정갈하게 그려지는 채소도감 속 귀여운 채소들이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 머릿속에 하나 둘 저장되는데, 문제는 그 리스트를 모두 다 듣고 나서도 내 입속은 여전히 입맛이 돌지 않는 것이었다.


20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도착해서 또 밥을 하고 싶진 않아 나는 그냥 남편이 먹는 음식을 나도 먹겠다고 하고 비행기를 탔었다.  


> 칼도 베르데

비행기에서 착륙 직전에 먹었던 기내식이 어찌나 맛이 없던지 환승시간을 포함해 20시간이 넘은 비행이었지만 결국 수저를 들었다가 세입을 먹어보곤 수저를 놓아버렸다.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 2시간이나 남았지만 가지고 있던 떡한덩이 사탕 두 개를 입에 물고 집에 겨우 도착했다.


집은 내가 없는 동안 감사하면서도 조금은 아쉽게 더 깨끗하고 말끔했다. 남편은 정말 혼자서 살았으면 유튜브에서 흘긋 봤던 미니멀리스트들의 집을 충분히 완성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남편이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자기가 무엇을 어디에 숨겨도 다녀와서 나는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 말했는데, 첫 이미지는 성공적인 듯했다. 두 달 만에 돌아온 집에는 공간에 빈 구석이 워낙 많다 보니 둘이 말하는 대화 소리 사이에 공기가 올라타 벽에 부딪쳐 우리 귀에 되돌아오는 메아리들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남편은 나에게 배가 고픈지를 물었다. 당연히 나는 배가 고팠지만 내가 먹고 싶은 것이 남편이 말했던 그 음식인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남편은 나에게 비행기에 타기 전부터 말했던, 자신이 만들 것이라는 그 비건 음식, 칼도 베르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텃밭에 가서 아직도 살아 있는지 몰랐던, 서리를 듬뿍 맞은 겨울 케일을 몇 장 잘라왔고, 주방에서는 자장가처럼 칼질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선잠을 깨우는 믹서기 돌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어느새 은은한 향이 주방을 넘어 내가 자고 있는 거실로 살짝씩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칼도베르도. 포르투갈 전통 스프라고 한다. 감자와 양파를 갈아 넣은 수프가 된장국의 국물을 만드는 것처럼 기본 바탕이 되고, 그 위에 근대나 시금치 같이 건더기 역할을 케일이하게 된다. 케일이 그럼 음식의 킥이 되는 재료인가 싶을 때, 칼도베르도 수프의 진짜 킥을 만드는 재료인 살라미를 얹으면 전통적인 포르투갈 스타일의 수프가 완성된다.


뭔가 한국에서는 국이나 수프를 만들 때 낯선 재료인 케일과 소시지의 조합이 맨 처음 음식을 시도할 때 나를 조금 망설이게 했지만, 막상 먹어보면 야채 수프의 기본 재료가 속을 편안하게 하고, 뻣뻣할 것만 같던 케일이 생각보다 부드러울 수도 있으며, 가끔 씹히는 살라미가 풍미를 살려주는 음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가끔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만드는 남편의 칼도 베르도는 야채 수프만 먹다 보면 약간 느끼해지는 순간 입맛을 다시 끌어올려주던 살라미가 빠진 칼도 베르도였다. 더불어 소금 간도 되지 않은 수프. 냄비의 뚜껑을 열어보니 아직 세상의 때를 타지 않은 아이의 피부처럼 뭔가 피부톤이 맑은 국물의 수프가 담겨 있었다.


의심스러운 눈길로 한번 국물을 떠먹어본 뒤, 나는 조용히 소금병을 들어 두 번 정도 가볍게 소금병을 돌려주었다. 남편과 함께 스프볼을 들고 바닥에 앉아 가만히 비건 칼도 베르도를 음미했다. 간은 세지 않았지만 편안한 감자와 조금씩 느껴지는 구워진 양파의 향, 그 국물과 함께 잘 어우러지는 후추의 맛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몇 번을 더 그렇게 맛있게 수프를 먹다가 어느새 옆자리 남편의 그릇의 바닥이 보일 때 즈음 나도 함께 수저를 놓았다.


> 배불러?

남편이 물었다. 야채 수프만 먹은 나에겐 애매한 질문이었다. 배가 부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배가 부른 것도 아니었다. 뭔가 로봇이 된 것처럼, ‘이런 수프들은 메인 음식이 아니라, 수프가 들어오면 이제 곧 진짜 맛있는 메인 음식이 들어올 거야’라고 주입된 로봇처럼, 배는 사실 부른 것 같은데 아직도 허기를 느끼는 느낌인 듯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들어올 메인 음식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다시 앞에 둔 스프볼을 들고 남은 케일을 씹어 먹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도 밥상의 상다리 휘어지게 풀코스를 알고 있는 한국인이 아니라 유럽의 목가적인 푸르른 초원 위에서 유유자적하며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는 한 마리의 소가 된 느낌이라는 것.


남편에게 말했다.


"나 소가 된 느낌이야. 내가 소라고 생각하면 분명 배가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아직 나는 한국에서 넘어온 지 하루가 겨우 넘은 한국인이라 아직 이 음식을 먹으며 배가 부르다고 말할 순 없을 것 같은데. 이상하네. 분명 많이 먹었는데 뭐가 더 먹고 싶은데, 근데 내가 많이 먹은 걸 아니까 안 먹고 싶은 게 맞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허전하네. 모르겠어."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채식만으로 언젠가 나는 고기를 먹은 것처럼 허기를 느끼지 않고 충분히 배가 부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입안 가득 씹히는 풍성한 이파리의 케일을 씹으며, 커다란 고기 한 점과 약간의 김치와 장아찌와 고추 한 조각과 마늘 하나가 가득 채워진 쌈 하나를 먹는다는 느낌으로, 나는 내가 정말 배가 부른 것일까, 아니면 정말 배가 부르지 않은 것일까를 궁금해하며 남편이 만들어준 칼도 베르도 한 그릇을 모두 비워냈다. 나름 자랑스러워 그릇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빈 그릇을 보여주니, 남편이 마치 어린아이가 밥 다 먹어서 칭찬을 기다리는 것 같다며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는 정말 배가 부른 것이었을까 아니면 부르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나의 감각에, 생각에, 느낌에 대해 궁금해졌다.


남편의 첫번째 비건식이었던, 콩과 케일이 듬뿍 들어간 칼도베르데남편의 첫번째 비건식이었던, 콩과 케일이 듬뿍 들어간 칼도베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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