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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영(殘影)

멈춘 시간 위에 드리운, 풍경의 흔적

by 강라마

페차부리 바닷가.

지도에는 ‘틸트 폴 비치(Tilt Pole Beach)’로 등록된 곳이다.

모두가 사진을 찍기 위해 찾는 장소.

솔직히 이곳은 이번 출사 여행에서 출사지로 제외를 했던 장소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갑자기 이동 중 이곳이 생각이 나 급하게 경로를 바꾸고 갔던 곳이다.

내가 그곳에 도착한 날,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했고, 바다는 말없이 그 아래를 받아내고 있었다.

처음 내 눈에 들어온 건, 바다보다도, 기둥보다도, 그 주변에 무수히 남겨진 ‘짓다만 건물들’이었다.

겉보기엔 평화로운 해변이었다.

맑은 하늘, 규칙적으로 밀려드는 파도, 그리고 그 사이를 걷는 사람들의 발자국.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낯설게 아름다웠다.

해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기울어진 콘크리트 기둥들.

마치 오래전부터 바다와 싸우며 버텨온, 거대한 잔해 같았다.

-2025-07-06-1.JPG <잔영(殘影):1>. 2025.06 | Thailand_Phetchaburi | Copyright © llama.foto(JeongHeon)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옆으로 돌리면, 콘크리트 구조물은 반쯤 무너진 채 바다를 향해 비스듬히 서 있고,

모래사장 너머에는 골조만 드러낸 건물들이 거대한 유령처럼 서 있었다.

해변에 들어서는 길에 있는 짓다만 건물에는 소들의 축사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곳은 원래 바닷가 리조트 단지로 개발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를 휩쓴 외환위기(IMF)가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수많은 계획들이 도중에 멈췄고, 건물들은 해변의 바람 속에 거의 30년 넘게 방치되었다.

결국 이곳은 완성되지 못한 시간이 스며든 채, 하나의 기억의 풍경으로 남게 된 것이다.


처음엔 그저 흥미로웠다.

기묘한 기둥, 대칭의 구조, 과장된 스케일.

흑백으로 담아내면 훨씬 더 드라마틱할 것 같았다.

사진을 편집하던 밤, 이곳을 흑백으로 작업했다.

채도가 사라지자, 오히려 풍경이 말을 걸었다.

기둥 사이를 걷는 사람들 뒤로, 시간이 흘렀고 기억과 현재,

건축과 붕괴, 꿈과 잔해가 검은 바다 위에서 선명히 나뉘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드는 사람으로서, 멋진 장면을 포착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기억되지 못한 장면을 마주하는 일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이곳은 단순히 ‘망한 프로젝트의 잔해’가 아니라,

누군가의 꿈이 꺾인 자리이기도 하고, 한 시대가 멈춘 구간이기도 했다.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단지 ‘지금’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늘, 완성되지 못한 과거의 파편들 위를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이곳을 단순한 촬영지로 기억하겠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려 이곳을 찾은 나는

결국 이 장소가 품은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해야만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2025-07-06-2.JPG <잔영(殘影):2>. 2025.06 | Thailand_Phetchaburi | Copyright © llama.foto(Jeong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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