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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룸 Dec 15. 2020

감 염 #2

  “맨날 그렇게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남자가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었다.

  “모르는 게 많아서요.”

  아, 하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은 왜 책을 읽는데요?”

  남자가 나에게로 물음을 돌렸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모르는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고……. 커피숍은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음……” 그가 잠시 허공으로 시선을 향하며 헤아리더니 “3년 하고 6개월 정도 되는군요.” 했다.


  대화의 문이 열리자 나는 수시로 물음을 날렸다. 그는 그때마다 차분하게 응답했고, 가끔씩 똑같은 물음을 나에게 돌려주곤 했다. 그런 대화를 통해 그가 나보다 열다섯 살 많은 오십 세라는 것, 증권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전업투자자가 되었지만 빚만 잔뜩 짊어지게 되었다는 것, 빚을 갚기 위해 일용직 노동자로 오랫동안 일했다는 것, 모든 문제가 욕심에서 비롯된다는 깨달음을 얻고 ‘최소주의’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는 것, 그래서 작은 방이 딸린 작은 커피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고, 그래서 커피숍 이름도 ‘월든’으로 지었다고 했다. 그의 말에서 자주 언급되며 핵심을 이루는 단어는 ‘최소주의’와 ‘자발적 가난’이었다. 저 멀리에 있는 크고 화려한 것을 쫓게 되면 주변의 작고 투박한 것에 애정을 가질 수 없고 함부로 하게 된다고, 그것이 곧 과거의 자신이었다고, 타자를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며 살다 보니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이제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고 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나는 ‘그’라는 책을 읽고 있는 듯 느껴졌다. 다른 어떤 책보다도 마음에 쏙 드는 책이었다.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면서도 그걸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그는 숨겨진 보석과 같았다. 의도치 않게 나는 그 보석을 발견한 것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는 사랑을 고백했다. 난생 처음 해보는 것인지라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용기를 냈다.

  “오빠.” 떨리는 음성으로 나는 말했다.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그러고는 두 손을 벌겋게 달아오른 뺨에 갖다 댔다.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그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가느다랗게 미소를 머금었다.

  “듣기 좋은 말이네요.”

  “오늘밤…… 오빠랑 함께 있고 싶어요.”

  내친 김에 마음속에 머금었던 말을 천천히 발음했다.


  커피숍에 딸린 그의 방은 정말 작았다. 이불과 베개와 행거가 전부인 좁은 공간이었다. 두 사람이 누우니 여유 공간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그러나 불을 끄고 그의 품에 안기자 온 세상을 얻은 것 같은 충만감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는 일이 생겨도 혼자서 끙끙 앓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평가를 내리지도 않았고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귀 기울여 들어주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라거나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라는 종류의 말로 나를 토닥여줬다.


  그러나 그렇게 1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나자 서서히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움텄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것인가, 언제까지나 이렇게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들이 쑥쑥 뿌리를 뻗었다. 서른다섯에 그를 만났고, 이제 서른여섯이고, 곧 있으면 서른일곱이 된다. 그는 쉰, 쉰하나, 쉰둘……. 남들보다 늦은 만큼 하루라도 빨리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서 길러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먼저 얘기를 꺼내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빠……. 우리 결혼할래?”

  어둠 속에서 그의 품에 안긴 채 지나가는 말을 하듯 가볍게 말을 흘렸다.

  “결혼이라……. 자신 없는걸.”

  아……. 무슨 반응이 이렇단 말인가.

  “오빠는 나랑 함께 살고 싶지 않아?”

  “지금 이렇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복에 겨운걸.”

  지금 이대로 살겠다고? 언제까지나? 죽을 때까지?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라왔다. 짜증을 꾹꾹 누르며 태연하려 애써야 했다. 

  “언제까지 나는 원룸에서 오빠는 이 좁은 공간에서 지낼 수는 없잖아. 나 그동안 직장생활하면서 모은 돈이 좀 있으니까 그 돈으로 커피숍 규모를 키우자. 돈 벌어서 아파트도 장만하고, 오빠 차도 한 대 뽑고, 시간 내서 여행도 다니고……. 나도 큰 욕심 없어. 그치만 최소한 남들 사는 만큼은, 아니 그 반만이라도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남들이 그렇게 산다고 우리도 그 기준에 맞추어 살 필요는 없잖아.”

  기대에 어긋나는 무사태평한 그의 읊조림에 더는 짜증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날 사랑하지 않아?”

  그의 몸에서 떨어지며 나는 소리를 높였다.

  “사랑하지, 엄청, 많이.”

  여전히 고요한 그의 목소리.

  “그럼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에 어느 정도 맞춰줄 줄도 알아야지, 안 그래?”

  부루퉁한 목소리로 나는 쏘아붙였다.

  “맞춰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맞춰줄 수 없는 것도 있는 거잖아. 맞춰줄 수 없는 걸 억지로 맞춰주려 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서로의 입장을 존중해 주면서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로 지내는 거야. 희진이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해 준다면 사랑도 결혼도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랑도 결혼도 불가능하지.”

  어쩌면 이렇게 늘 차분하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머리에서는 받아들였지만, 가슴에서는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그럼, 나를 맞춰주는 남자를 만나서 내가 떠나도 오빠는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마음이 아프겠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겠지. 나보다 더 나은 사랑을 만난 것에 대해 축복해 주어야겠지.”

  “듣기 싫어!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어!”

  나는 홱 돌아누우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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