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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Sep 17. 2022

인터넷은 새로운 바보상자인가?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티브이(이하 TV)를 바보상자라고 부르곤 했다. 거칠게 말하면 TV만 보면 바보 된다는 게 그 주된 이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TV를 즐겨보던 어린이들은 어느새 성인이 되었고 다행스럽게도 바보가 되지는 않았다(라고 생각한다). 바보의 벽을 넘은 이들은 이제 다음 세대를 비슷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지 않고 TV만 보면 바보 된다"는 말을 "책을 읽지 않고 인터넷만 하 문해력이 떨어진다"는 조금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바꾸어서.


사진 출처: 네이버 뉴스



사실 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신기술은 늘 '책'과 '독서'를 위협하였고 그에 따른 지적 능력의 퇴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늘 있었지만, 책은 여전히 존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읽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지적 능력은 눈에 띌 정도로 퇴보하지는 않았다.(나의 글이 현인류의 지적 능력 퇴보의 근거로 쓰이지 않기만 바란다)


책은 신문을 극복했듯 축음기를 극복했다. 듣기는 읽기를 대체하지 못했다. 에디슨의 발명품은 시나 산문을 읊는 것보다는 음악을 연주하는 데 사용되었다.

20세기 동안 책 읽기는 치명적으로 보이는 위협을 받았는데, 이 위협들이란 영화 관람, 라디오 청취, 텔레비전 시청 등이었다.

-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중 -



인터넷은 기존의 신기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영화, 라디오, TV 등의 기존의 신기술들과는 다르게 인터넷 없이는 삶을 살아가는 게 힘들 정도로 우리의 삶이 인터넷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책 그리고 독서도 신기술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신기술이 등장했을 때는 모든 신기술들이 그러하였듯 사람들의 반발과 걱정 어린 시선이 있었다. 심지어 서양 철학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소크라테스 마저 책과 독서를 우려스럽게 보았으니 말이다. 마치 유튜브에 중독된 젊은 세대를 바라보듯 말이다.


고대 사상가들 중에는 사유와 성찰의 영역에서도 말하기/듣기가 읽기/쓰기보다 더 뛰어난 도구라고 주장한 이들이 있었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오로지 말로써 제자들을 가르쳤고, 소크라테스는 책과 독서에 반대했다. 불교와 동양철학은 여전히 깨달음은 경전 너머에 있다고 보는 관점을 견지한다.

진리가 적힌 책을 얻으려고 온갖 고생 끝에 서천에 도착한 삼장법사와 손오공 일행이 처음으로 받은 불경은 아무 글자도 적히지 않은 책, <무자진경(無字眞經)>이었다.

- 장강명의 <책, 이게 뭐라고> 중 -



읽기와 쓰기는 불완전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누군가와 소통할 때를 생각해 보면 문자보다는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다는 것을 모두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행위가 구체적으로는 독서가 지금처럼 추앙(?) 받게 된 이유는 그것이 고차원적인 사고를 이끌어내고 또한 그 결과 사회적으로 성공하는데 보탬이 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쉽게 말해 독서를 해야 똑똑해지고 성공한다는 인식 말이다.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책을 즐겨 읽는 내 입장에서는 굳이 반대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 읽기 또한 마찬가지다.


읽기라는 신기술을 접하기 전의 인간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고도의 추상화 능력이 부족한 대신 다른 능력이 발달했을 것이다. 세상과 나 사이에 글자가 끼어들지 않는, 그래서 세상을 온몸으로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능력 말이다. 다시 말해 읽기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강렬한 감각과 직관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표현을 빌리면 '원개념'이 희미해진 것이다.


뇌의 구조를 고려할 때, 개념 획득 이전 인간의 뇌 속에 가득 차 있던 것은 비주얼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비주얼한 이미지에 청각, 촉각, 후각 이미지 등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육체의 전 감각 기관과 리얼리티와의 만남을 통해 생긴 '전(全)감각 복합적 기억 단편(이미지)'이다. 이것이 바로 개념 이전의 개념이며, 여기서 개념이 생겨났으므로 '원개념(原槪念)' 또는 '전개념(前槪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중 -



이와 마찬가지로 독서보다 인터넷 매체를 통해 비주얼과 하이퍼 텍스트가 결합된 정보를 더 많이 접하면서 우리는 기존의 능력을 잃고 새로운 능력을 얻어가고 있다. 지식의 깊이는 얕아지는 대신 지식의 전환은 빨라지는 것이다.


연구 결과 컴퓨터와 인터넷 사용으로 인해 특정 부분의 특정 인지적 능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강화되었다. 이 능력들은 손과 눈의 조화, 반사적 반응 그리고 시각적 신호에 대한 처리와 같은 낮은 수준의 원초적인 정신적 기능들이다.

2003년 <네이터(Nature)>에 발표된 후 자주 인용되는 비디오 게임에 대한 연구를 보면, 컴퓨터로 액션 게임을 한 청년 그룹은 열흘 후 여러 다른 이미지와 업무들 사이에서 시각적인 초점을 바꾸는 속도가 상당 수준 증가했다. 베테랑 게이머는 초보자에 비해 시야 내에 있는 물건 중 상당 부분을 더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이쯤 되면 "그래서 책을 읽으라는 거야, 인터넷을 하라는 거야?"라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책도 적당히 읽으면서 인터넷도 적당히 하세요"라는 중도의 답을 전하면 가장 무난하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본인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매체를 선택하는 게 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상황마다 답이 달라진다. 본인이 꿈꾸는 미래에 가장 도움이 되는 지적 능력에 도움이 되는 매체에 집중하면 된다. 나는 그것이 '책'일뿐이다. 


독서를 할 때 얻을 수 있는 사고의 깊이가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가장 도움이 되는 지적 능력이라고 판단해서 나는 '책'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깊이 읽는 행위는 대부분 소수의 문화였고 요즘 같은 대중적 독서는 극히 예외적인 현상인데 나의 기질상 소수의 문화가 더 맞기도 하다.(일종의 홍대병일 수도 있지만)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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