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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류 Jun 08. 2024

혹시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 있나요?

소유한다는 건 소유당한다는 것이다

혹시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 있나요? 왜 버리지 못하는 걸까요? 


냉장고를 가득 채운 음식은 잘 버리면서 유독 내가 버리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책이다. 배움이 부족하다 느껴서일까, 나의 손때 묻은 책들을 버리면 머릿속의 지식이 날아간다고 느껴서일까. 누군가 좋다고 해서, 누군가 이 책 정말 대박이라고 해서, 출판사 광고에 혹해서 한 권 두 권 산 책들이 지금은 내 방 서재를 꽉 채우다 못해 차고 넘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읽은 책도 버리지 못하고, 아직 읽지 않은 책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버리지 못하는 건 놓아버리지 못한 내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두 차례 이사를 오면서 어쩔 수 없이 100여 권의 책들을 버렸다. 낙서가 많이 되어 있는 책들은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렸고, 읽지 않은 새 책은 알라딘 중고 매장에 가져다 팔았다. 책을 팔러 가서 얼굴이 화끈 거리는 경험을 했다. 알라딘 중고 매장의 직원은 책의 보관 상태에 따라 등급을 매겼고 매장에 재고가 많은 책들은 매입이 불가하다는 말을 건넸다. 직원 앞에 쭈뼛거리며, 안절부절못하니 내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급기야 뒷목으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기도 했다. 책을 살 때는 책상에 편하게 앉아 클릭 몇 번으로 살 수 있지만, 책을 되파는 일은 살 때보다 10배는 힘든 일임을 몸소 경험했다.


시기가 지난 책들은 정가의 10% 가격을 받았고, 상태에 따라 30%에서 40% 가격을 되돌려 받았다. 100여 권의 책을 팔기 위해 쏘카를 렌트했고, 내 힘으로 책들을 옮겼고, 다시 쪽팔림을 감수해서 얻은 것은 약 12만 원의 돈이었다. 


살 때는 어림잡아 140만 원의 돈이 들어갔을 텐데 내 손에 돌아온 것 고작 12만 원이 전부였다. 알라딘 중고 서점을 나오면서 앞으로는 꼭 읽을 책만 사야지라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 결심은 새로운 장소로 이사한 날 바로 깨지고 말았다. 새로 이사한 곳에서 난 책장을 두 개나 새로 주문했기 때문이다.


이사 오면서 버린 책들을 다시 다 사들인 것 같다. 빈 책장은 내 텅 빈 머릿속과 같이 느껴졌을까.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지적 열망 아니 어쩌면 열등감일지 모르는 것에 휘둘려 막힘없이, 거침없이 또 책을 사고 또 샀다. 결국 책장은 책들이 숨 쉴 수 없이 빽빽이 들어찼고 급기야 책의 윗 머리에 책을 또 얻는 형국에 이르렀다. 마치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 9호선에 탑승한 것처럼. 


책은 내가 샀지만, 내게 팔려온 책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책들은 나를 보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김정운 교수의 책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에 보면 '슈필라움'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슈필라움'은 독일어에만 존재하는 단어로 '놀이'와 '공간'이 합쳐진 말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여유 공간'정도가 된다.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실제 '놀이하는 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을 뜻한다. 


두 번째 이사를 오면서 방 하나를 나만의 '슈필라움'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방의 이름은 '오류의 서재'라고 지었다. 이 공간을 나만의 놀이 공간처럼 만들고자 했다. 책장 3개, 책장 1개, 눈에 좋다는 프리즘 조명까지 세팅하니 정말 근사한 나만의 '슈필라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년 뒤, 나의 욕심으로 가득 채운 이 방은 더 이상 '슈필라움'이 아니었다. 놀이의 공간이 아닌 심리적 압박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내가 창조한 자유롭고자 했던 공간이 오히려 나를 압박하는 중이라니. 주객이 뒤바뀐 셈이다. 그즈음 손흥민의 아버지 손웅정의 인터뷰 집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를 읽게 됐다. 그 책엔 지금 내게 필요한 말들이 보였다. 인터뷰이가 손웅정에게 묻는다. 매일 읽고 쓰시니 집에 책이 엄청 많을 것 같다고. 그 질문에 손웅정은 단칼에 '아니요, 전혀요.'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읽고 쓰고 난 다음에 책은 바로 다 버려요. 사실 버리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잖아요. 단호한 결단에서 비롯하는 거니까요. 근데 그건 결국 내 책임이거든요. 책은 버리지만 난 이미 책에서 취할 핵심은 다 가진 뒤니까 망설임도 없고 여한도 없는 거죠.

책을 산 건 난데 어느 순간 책이 나를 소유하고 있더라고요. 내 소중한 공간을 다 차지하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더라고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요, 책꽂이에 책을 쭉 꽂아놓은 모양새가 나 책 읽었네 하고 티 내고 자랑하는 것 같아서 영 싫더라고요. 또 그 책 먼지 그거, 다 내 청소 일밖에 더 돼요? 그리고 솔직히 우리 그거 나중에 다시 꺼내 보겠어요, 안 보겠어요. 편집이란 결국 선택과 포기의 문제가 아니겠어요?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 19p) 


책을 산 건 난데 어느 순간 책이 나를 소유하고 있더라고요. 내 소중한 공간을 다 차지자호 주인 행세를 하고 있더라고요라는 문장에서 지금의 딱 내 모습이 보였다.


머리를 망치로 한대 '쾅'하고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미 먼저 해본 이의 지혜가 책을 통해 내게 전해졌다. 버리는데도 용기가 필요하단 걸, 삶은 선택과 포기란 것도.


오늘부터 책들에게도 숨 쉴 공간을 내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켜켜이 쌓인 먼지에서 이제 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나만의 공간을 돌아보고 이 공간에 계속 머물고 싶도록 방을 가꾸는 일을 해야겠다. 책을 소유하려 하지 말고 그 안에 담긴 사람의 말들을 남겨야겠다. 책을 버려도 괜찮다. 나에게 필요한 책이라면 언제든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글로 쓰고 나니 마음은 한결 홀가분해졌다. 이제 나도 책을 버릴 용기가 생겼다. 오늘은 10권쯤 버리고 마음의 여유를 챙겨볼 셈이다. 그 홀가분한 여유를 내 '슈필라움'에도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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