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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 Oct 19. 2020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

해석도 어렵지만 시작도 어렵다는 추상화. 그림을 그저 취미로 즐기는 비전문가들이 한 번쯤 궁금해하면서도 언젠가는 시도해 보고 싶은 장르다. 나도 그러했다. 추상화 작업을 해 보고는 싶은데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 흰 캔버스 하나 세워두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그려보세요"라고 한다면, 마치 '정지 화면 아님'이란 자막이 달린 영상 속 장면처럼 되어버릴 게 뻔했다. 


그래도 누구에게나 첫 경험의 순간은 오기 마련이다. '단풍국'이란 애칭에 맞게 노랗고 빨간 낙엽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하던 어느 해 가을 초입, 캐나다 퀘벡을 여행 중이던 나는 손가락이 근질거리는 일종의 금단현상을 느꼈다. 매주 미술학원을 들락거리며 그림에 한참 재미를 느끼던 차에 떠난 (고작) 열흘간의 휴가였다. 몬트리올에 내린 지 서너 일쯤 지났을까. 이때쯤이면 그림을 그릴 때가 됐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몸이 자동으로 반응하는 듯했다. 결국 좀이 쑤셔 더는 못 버티고 원데이 클래스라도 없나 찾아보게 됐다.  


확실히 퀘벡주에는 예술가들이 많았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 물 건너온 이민자들이 많아서일까. 곳곳에 갤러리나 그림 가판대가 많았고, 그림을 그리는 데일리 클래스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망설일 것 없이 숙소에서 가깝고 일정에도 잘 맞는 클래스 하나를 찾아 바로 신청과 결제를 마쳤다. 클래스의 주제는 때마침 '추상화'였다.


클래스 운영자 A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게도) 프랑스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이민 예술가라 소개하고 영어가 부족하다며 이해를 구했다. 그리고 (이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단 두 명의 참가자가 전부였다. 다른 참가자는 나처럼 잠시 휴가를 즐기러 퀘벡에 왔다던 독일 여행객이었다. 너무 조촐해서 첫 만남부터 적막감이 순간 돌았지만, A가 마련해 준 웰컴티를 마시며 인사를 나누다 보니 이내 화기애애해졌다. 셋 다 영어가 그리 능숙하지는 않았으나 그마저도 괜찮았다. 예술 세계에서 언어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A가 나눠 준 종이에는 Words, Colors, Shapes가 적혀있었고, 친절하게도 한국어가 함께 번역돼 있었다. 참가 신청서에 국적을 묻는 질문이 있었는데, 역시 A에겐 계획이 다 있었다. 옆자리 친구도 종이에 적힌 독일어를 보며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A는 작업실 내부를 구경시켜 준 뒤 책상 주변에 쌓여있던 잡지들도 꺼내 훑어보라 권했다. 잡지의 페이지들을 넘겨가며 눈에 들어오는, 또는 마음에 드는 색이나 패턴이 있는지 묻기도 하고 지금 기분은 어떤지, 충분히 편안한지, 평소 좋아하는 단어가 있는지 등을 두서없이 질문했다. 그러더니 지금까지 말했던 단어들, 마음에 드는 색깔, 떠오르는 패턴들을 종이 위에 적어보라 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게 될 추상화의 기본 틀이 될 거라면서. 


정말 "와우" 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어색함을 깨고 그저 편안하게 해주려는 건 줄 알았는데, 이 모든 게 실제 작업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하나였다. '생각보다 너무 능숙한데?' A의 프로그램 운영 스킬에 감탄하며 머릿속에 떠다니던 단어와 느낌들을 붙잡아 종이 위에 하나씩 적었다. 평화, 자연, 둥근... 레드, 골드, 블루... 잡지 속 한 여자 모델의 스카프에 있던 동그라미 문양, 무심코 페이지를 넘기다 찰나의 순간에 내 시선에 머물다 지나가 버린 물결무늬 등을 그려 넣었다. A가 말했다. "계획이 다 세워졌네요. 이제 작업을 시작해 보세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마다 접근 방식은 다 다를 테지만, A의 작업 방식이 참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만 한다면 나같이 추상화에 문외한 사람도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사이즈였지만, 나의 첫 추상화는 이렇게 스케치 한번 없이 단번에 완성됐다. 그리고 그림을 보며 왜 그런 단어들, 그런 문양들을 떠올렸을까 거꾸로 생각해 보게 됐다. '평화란 단어가 왜 튀어나왔지? 물결무늬가 왜 내 시선을 사로잡았지? 빨갛고 파란 이 색들이 왜 마음에 든 거지?'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던가. 

나는 왠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모든 신경을 쏟고 있는 분야, 가끔은 잊어버리고 싶지만 사실은 그럴 수 없는 현실. 그것들과 연결 지어보니 찰떡같이 맞아떨어졌다. 가끔 '무제'라 적힌 추상화를 볼 때 뭔가 더 그럴싸하다고 (문외한으로서) 느꼈던 적이 있지만, 나는 이 소박한 작은 그림에 제목을 붙이고 싶어졌다. '남과 북'이라고... 


같은 듯 다르고, 이어질 듯 끊어져 있다. 조화를 이루며 합쳐지는 것 같다가도 한순간 물거품 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자연스럽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애잔하고 먹먹하다. 우리(남과 북)의 처지가 풍경화도 정물화도 아닌, 뭔가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추상화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드니, 이마저도 참 절묘했다. 


잠시 잊고 있었다. 분단, 통일, 북한을 취재하는 기자라는 내 신분을.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 가며 써내는 글이 너무 무겁고 치열해서, 잠시나마 그것들을 잊기 위해 일부러라도 휴가지를 해외로 정해왔는데, 웃고 떠들며 시작한 하루가 무거운 현실로 귀결돼 버렸다. 가만히 그림을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정지 화면 아님' 


계획한 대로 세상일이 이뤄진다면, 마냥 좋기만 할까? 나의 추상화는 계획대로 됐지만, 휴가 때만큼은 일은 잊겠다는 다짐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 때문에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이상을 좇더라도 한 발만큼은 현실에 꼭 딛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이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예술가의 숙명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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