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에 받은 스마일라식에 대한 점검 차, 안과에 들렀다. 접수하는 도중, 직원이 나에게 한 말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질문이었다.
“저, 병원 오셨는데 왜 마스크 안 쓰고 오셨어요?”
안과에 방문했던 시기는 바로 휴가였다. 여수, 순천 등 전국각지를 여행하고, 가족들과 부산에서 호캉스를 즐기기도 하며, 친구들과 만나 술 먹고 담화를 나누는 등 알차게 보내던 때였다. 그러다 까먹고 만 거다.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말이다.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며 늘 마스크를 필수로 착용하고 환자와 마주했던 나로선, 스스로 놀란 순간이다. 와, 휴가를 알차게 보내긴 했구나! 일하는 게 아니더라도, 병원에 방문할 땐 마스크를 껴야 한다는 걸 잊어버릴 정도로.
그때야 제대로 실감했다. 이젠 정말 마스크를 안 껴도 되는 게 맞긴 하구나. 특정 장소 몇 군데를 제외하고.
2023년 5월 5일, 코로나19 비상사태가 해제되었다.
이제는 일반 유행병 수준으로 관리 가능하다는 판단으로 내려진 결정이다.
무려 3년 4개월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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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속에서 살아갈 땐 길어도 너무 길다고 느꼈지만, 마침표를 찍는 순간 짧게만 여겨졌다. 물론,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거칠게 비가 오던 날이다. 그런 날엔 우산을 쓰는 게 당연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방호복을 입고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끝이 보이지 않던 줄을 마주하며, 코와 입을 찌르는 검사를 반복했다. 그러다 깊숙이 넣었다고 욕이란 욕을 다 먹고, 먼저 해달라는 들어줄 수 없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줘야 했으며, 어린아이들은 협조조차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알코올을 매번 뿌려서 계속 소독했는데, 하필 겨울이었다. 알코올 뿌릴 때마다 온몸이 시리더라. 바람이 불고 비까지 내리니 감기 걸릴까 봐 걱정되었고. 소독 한 번 할 때마다 난방기 앞에 가서 얼어붙은 몸을 녹여야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날씨가 이상했다. 눈이 내리더라. 그러다 비가 왔다. 다시 눈이 내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비가 오네? 그렇게 차례대로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눈과 비가 동시에 오더라. 거기다 해까지 뜨고. 눈, 비, 해를 동시에 목격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세상이 멸망할 징조인가?”
방호복 입은 상태로 땀을 한껏 흘리는데, 겨울에다가 비가 오지만 밖에 뭔가를 입기도 애매해서 추위는 추위대로 겪고, 일은 일대로 했던 내 정신 상태는 매우 시니컬했다는 걸 감안하면 좋겠다. 물론 생각만 그렇게 했을 뿐이다. 해야 할 일이 많았으므로, 잡생각을 금방 다 버려야 했으니깐.
코로나19 초창기였던 2020년 2월의 어느 날이었다. 내일 쓸 방호복이 없단다. 그런데 일은 해야 할 거 같다는데, 어떻게 하라는 건지……? 일은 반드시 하되, 코로나19 걸리는 건 네가 알아서 대처해라? 내 알 바 아니다! 이런 의미일까? 아찔했던 순간이다.
“대구 오세요.”
“가면 어디서 지내죠?”
“…일단 오세요.”
한 마디로 일하러 오란 말이다. 지낼 곳은 나도 잘 모르겠으니 일단 와라! 알아서 해결하란 거지. 오죽했으면, 보건복지부에 전화해서 따지던 이들이 꽤 많았다더라. 아니, 숙소는 챙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 급박한 상황일수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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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마스크를 새로 써야 하던 만큼, 부족하면 구매가 사실상 필수였는데,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기억날지 모르겠지만, 한때 마스크 5부제를 실시해서, 줄 서서 기다리면서 마스크를 마련하던 때도 있었다.
마스크를 쓰는 건 나 역시 힘들었다. 익숙해도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불편감 때문에. 뜨거운 여름엔 방호복 안은 열기로 가득했고, 추운 겨울 역시 일교차로 인해 땀을 한가득 흘리면서 동시에 바깥의 추위 때문에 컨디션 저하가 자주 발생하여 미칠 것만 같았다. 일하는 것 이외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외로웠고, 내가 걸려서 타인에게 피해 주는 일이 발생할까 무섭기도 했고. 육체와 정신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지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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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나 역시 코로나19에 확진되고 말았다. 냉장고에 일주일 먹을 음식이 없고, 배달조차 되지 않아서, 같이 일하던 직원들에게 부탁하여 격리 생활 속에서 굶어 죽지 않고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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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보건의사 제대 직후, 곧바로 인턴으로 근무했다. 중환자실에서 코로나 확진된 이들을 대상으로 피를 뽑아 검사하고, 소변줄을 넣기도 하며, 심정지가 발생하면 어떻게든 살리고자 30분에서 1시간 가까이 심폐소생술을 진행했다. 이 역시 방호복을 입고 말이다.
이제야 3년 4개월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연속이었다.
언제까지 해야 할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니, 쓰러지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버텨냈다.
언젠가는 웃으면서 이 순간들을 돌이켜볼 수 있겠지?
전염병에 빼앗겼던 자유를 돌려받기 위해 분발했던 시간을 추억 삼아 술 한 잔과 함께 털어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여기면서 말이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마트에서 물품들을 사려는 이들이 붐빈다. 콘서트 한 번 가려고 예약하고자 하면 불가능할 때도 꽤 많았다. 야구장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롯데 자이언츠가 탑데를 찍던 시절엔 갈 엄두를 못 냈다. 외야조차도. 올해 여름, 바닷가는 터져나갔다. 10시까지 운영하던 술집에 대한 기억도 이젠 사라졌다. 12시는 기본이고, 새벽 5~6시까지 운영해도 무방하다.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이들과 소주 한 잔, 맥주 한 캔을 자유롭게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드는 게 솔직히 아직도 낯설고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약 4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마주하던 이 순간들을, 다시 접하게 되니 좀 울컥했다.
원했던 그때가 돌아왔구나.
4년이 아깝진 않았구나.
물론 완벽하게 끝난 건 절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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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든 다시 자유를 빼앗길지라도, 이젠 우리는 알았습니다.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그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신 오지 않길 바라지만 결국에 찾아오게 될 또 다른 전쟁에서도 버틸 수 있다는걸.
길고 긴 시간이 될지라도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는 것 또한 배웠습니다.
결국 되찾아서 다행입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