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잠을 자 본 적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집은 두 살, 네 살, 여섯 살의 꼬맹이 셋. 파킨슨 중풍으로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시누이, 직원들 장정 다섯 명에 우리 부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아이들과 시누이를 돌봤다. 시누이는 밤마다 자다깨면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시달려서 나를 찾았다. 엄마 따라서 자다 깬 막내아이를 안고 일단 시누이 곁에 있어 줘야 했다. 책을 읽어 주기도 하고 시누이의 지난 시간들을 이야기하다가 밤을 새우기도 했다. 아이들보다 시누이를 위해 책을 읽어 주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새벽부터 준비해도 나의 아침은 항상 정신이 없었다. 장정 다섯 명과 아이들 셋,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시누이의 죽까지 아침상을 마련하느라 초 단위로 시간을 아껴야 했다. 끼니때마다 시누이에게 밥을 먹여야 해서 정작 두 돌이 지나고 있는 막내에게는 밥 한 번 제대로 먹여 주지를 못했다. 겨우 겨우 아침을 마치고 큰아이와 둘째를 유치원에 보낸다. 장정들이 모두 출근하고 나면 나의 다음일이 기다린다. 일단 막내를 등에 업고 일을 시작한다. 식구들이 모두 나간 집안을 훑어본다. 열한 명의 식구가 사는 어수선한 현관부터 청소를 시작한다. 대소변을 못 가렸던 시누이의 이불 빨래와, 직원 다섯 명이 벗어던진 옷가지들, 한창 뛰어놀기 시작한 세 아이들의 빨래까지 세탁기를 하루 종일 돌려도 빨래 지옥은 벗어나기 힘들었다.
나의 하루의 기분은 시누이에 달려있었다. 시누이가 기분이 좋을 때는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시누이는 기분이 좋다가도 하루에 한 번쯤은 자신의 신세가 서러워 통곡을 했다. 그런 시누이를 달랠 때는 내 자존감도 바닥을 쳤다. 시누이의 건강을 잃은 절망과 비통함이 내 몸 안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시누이의 나이는 나보다 겨우 열 살 많은 40대 초반이었다. 시누이의 절망을 감싸주기에는 내 몸이 너무 지쳐 있었다. 그때마다 신앙도 없는 나는 시누이의 예수님께 기도를 했다.
“아~, 형님의 예수님!!!
제발 진정 좀 시켜 주세요. 내가 죽을 것 같아요!!!”
23년8월31일 슈퍼문
나 자신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무 생각을 못하고 있어도 시간은 지나고 있었다. 일이 닥치면 눈앞에 일부터 하나씩 헤쳐 나가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몇 달이 지나고 아이들은 쑥 자라 있었다. 몸이 너무 힘들면 정신은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시기였다. 아이들에게는 일생의 단 한 번인 시간들이 지나고 있었고, 나에게는 내 인생의 중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일상이 너무 고된 육체는 정신을 지배하여 아무 생각을 못하게 만들었다.
지금 돌아보니 젊었을 때 나는 참 미련한 곰 같은 사람이었다. 다른 대안이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다섯 명의 장정들도 직원이라는 이유로 따뜻한 밥이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30여 년 전 그 당시 시골출신 우리에게는 서울에 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취직했다고 올라왔는데 따로 살림을 내 보낼수는 없었다.
아픈 시누이도 누군가의 도움을 조금씩 받았으면 됐을 것을 도움 받을 생각을 못했다. 시누이는 30대 초반 너무나 젊은 나이에 중풍이 왔었다. 시집에서는 쫓겨나고 오갈 곳이 없을 때였다. 우리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남편은 시누이때문에 결혼을 포기해 가고 있었다. 누나를 안타까워하는 남편의 불편함을 내가 견뎌보기로 했다. 주변에서 `착한 척하지 마라. 긴병에 효자 없다.`라고 말렸다. 나는 일단 견뎌보기로 했다. 그런 시절이 신혼부터 7년이었다.
나는 가끔 그 시절의 나를 그리워할 때가 있다. 맹목적으로 성실했던 내가 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지, 숨 쉴틈도 없던 시간들을 잘 견뎌 낸 내가 기특해서이다. 삶에서 도망갈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묵묵히 견뎌 낸 젊은 내가 대견해서이다. 결코 후회되지 않는 시간들이다.
지금 나는 그때랑 비슷한 맹목적인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물론 월급을 받는 직장의 일이지만 내 인생 마지막 직장이라는 감성이 보태져서 정말 회사가 잘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일을 한다.
우리 회사는 창업한 지 몇 년 안 되었다. 나는 작업 준비와 운영 계획을 생각하느라 쉬는 시간도 별도로 없었고 식사 시간마저 제대로 챙겨보질 못했다. 어떻게든 회사가 잘 되기만을 바랬다. 생산 현장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고 그 현장을 맡겨놓을 만한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부족한 시스템을 운영능력으로 메꿔야 했고, 그러다 보니 근무시간 뿐 아니라 퇴근 후까지 일의 연장이 당연시되었다. 사실 나의 그런 노력은 아무도 모른다. 알아주기를 바란적도 없다. 누군들 알 필요도 없다. 일이 재밌다. 사람들이 좋다. 일에 미쳐 있는 사이 나는 관리자가 되어 있었다.
요즘 회사는 후배 관리자가 늘었고 시스템도 안정화되어 가고 있다. 법적 휴게 시간을 즐겨도 되고, 화장실도 편히 다녀도 될 만큼 맡겨 둘 관리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밥 숟갈을 놓기가 바쁘게 현장으로 들어가고, 보고서는 집으로 끌고 온다. 집에서 보고서를 만드는 나를 보면서 MZ세대인 우리 아이들이 충고한다.
"엄마!!! 설마 다른 분들도 집에 가서 보고서 작성해 오고 그러는 건 아니지?"
난 속으로 뜨끔했다. 다른 관리자들에게 "생산시간에는 생산에만 집중해라"를 입에 달고 있으니 그들이 다른 잡무는 어디서 해오는 것일까?
"엄마!! 그랬다면 엄마는 찐 꼰대다. 직장에서 하는 일은 직장에서 끝낼 수 있게 시간을 주는 게 맞죠."
사회초년생인 아이들의 충고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내일부터 당장 후배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걱정이 앞선다. 나의 맹목적인 일에 대한 집념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시간을 되돌려보았다. 후배들은 직장을 행복하려고 다닌다고 말했는데 나는 듣기만 하고 말아버린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에고~ 딸아이의 "엄마 그러면 안돼요" 하는 눈빛에 머리가 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