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운 지도 벌써 5년이 다 되어간다. 가끔씩은 그의 한국어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난감해지기도 한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늦가을이 되면 보일러를 켜고 바닥에서 몸을 지지며 잔다. 그는 침대를 놔두고 바닥에서 자는 나를 신기하게 보았다.
그가 한국에 오고 난 뒤 주말 아침은 늘 같은 루틴으로 움직인다. 그는 아침형인 대만 사람답게 새벽 6시면 우리 집에 도착한다.
그날도 주말에 바닥의 온기를 느끼며 자고 있는데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왔다.
그가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내 옆으로 와 철퍼덕 앉았다.
그를 향해 이불을 걷으며 같이 눕자고 유혹했다.
"춥지? 엄청 따듯해. 들어와서 조금만 더 자자!"
"아냐. 난 손만 좀 녹이고 감자가 다 자고 일어날 때까지 노트북 할게."
"그럴래? 손 차갑지?"
"응."
"얼른 여기다 손 집어넣어!"
그러자 그가 두 손을 이불속에 쑥 넣었다. 그의 손을 덥혀주며 다시 선잠에 빠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내 몸을 핫팩 만지듯 꾹꾹 누르며 만지더니 말했다.
"감자 지금 되게.. 따끈따끈하다..."
따끈?
나는 잠이 깨서 그에게 말했다.
"사람한테는 따듯하다고 말하는거야.“
"오잉? 따끈하다 뜻이 따듯하다 아니야?"
"음.. 따끈하다는 호빵이랑 찐빵한테 쓰는 말이야. 사람한테는 잘 안 써."
"어? 근데 ‘따듯하다’보다는 좀 더 뜨겁고, ‘뜨겁다'보다는 약한 건 어떤 단어로 표현해?"
"어....?"
말문이 막혔다. "지금 감자 몸은 따듯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따끈한데?!"
나도 궁금했다. 글쎄... 뭘까... 내 짧은 어휘력으론 더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앵무새처럼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래도 따끈하다고는 안 해. 따끈하다는 갓 찐 호빵한테 쓰는 말이야."
그가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오 그렇구나...
얼마 뒤 그는 또 바닥에 몸을 지지는 내 몸에 손을 대면서 말했다.
"빵 찐 것 같다..."
응?
그가 한국어로 제일 많이 대화하는 상대는 나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는 내 말투를 많이 닮았다.
언젠가 그의 입에서 개꿀이라는 말이 나오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뒤론 바르고 고운 말을 쓰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올바른 한국어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내가 놓친 게 한 가지 있었다.
어느 날 그와 함께 카페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딸기우유가 날아왔다. 수제 딸기우유의 딸기 덩어리가 테이블에 툭 떨어졌다.
옆테이블에 앉아있던 분이 유리병으로 파는 우유를 사서 뚜껑을 이미 열어놓은 걸 깜빡하고 흔들다 딸기우유가 오만 데에 튄것이다.
그분은 본인도 딸기우유를 뒤집어 씐 채로 미안하다고 여기저기 사과를 했다. 당황한 사이에 남자친구가 휴지를 가져오며 외쳤다.
"어머 세상에나!!"
그러자 딸기우유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그를 쳐다봤다.
그는 휴지를 주며 그 사람들에게 말했다.
“어머! 어머! 닦으세요.”
그러자 사람들이 웃음을 참는 얼굴을 했다. 그는 뭔가 이상한 걸 감지한 모양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향해 물었다.
감자야 나 얼굴에도 우유 묻었어?
나는 말했다. "아냐... 그거때문에 웃는 거 아니야..."
그가 궁금해하길래 내가 조용히 말했다.
"어머라는 말을 그렇게 높은 톤으로 남자가 잘 안 쓰긴 해. 그래서 사람들이 웃겨서 웃은 거야."
그러자 그가 아! 하고 상황을 파악한 듯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중국어로 말했다. 우리 대화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나도 중국어로 물어봤다. "왜 갑자기 중국어 써?" 그러자 그가 속삭였다. "내가 외국인이라 모르고 어머 쓴 거 알려주려고 그러지.“
그는 협조를 좀 해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는 중국어를 쓰며 본인이 외국인이라 잘 모르고 어머를 외쳤다는 걸 허공에 어필했다.
웃음을 참던 사람들이 우리의 중국어를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와 함께 길을 걷는데 '웅비하라'라고 써져 있는 현수막이 있었다. 웅비하다? 뜻이 뭐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니 그가 입을 떡 벌리고 물었다.
"어떻게 웅비하다라는 말을 몰라?"
"알고 있었어?"
그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응! 한국어 교재에 있었어. 감자는 그럼 25년 동안 웅비하다라는 단어를 모르고 산 거야?”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자신만만해하면서 외쳤다.
"내가 감자보다 한국말 더 잘 아네!"
나는 급하게 변명을 했다. “억울해! 웅비하다는 잘 쓰는 단어도 아니고... 그리고 난 언어 능력이 없어! 국어가 날 너무 괴롭혀서 재수도 국어때문에 했단 말이야!"
그러자 그가 잔뜩 신나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외국인보다는 잘해야지! 우리 감자 대만사람보다 한국말 못 하네!"
하루는 내가 그에게 말했다.
"나는 '십상'이랑 '쉽상'이 맨날 헷갈려서 맨날 인터넷에 쳐보고 확신을 얻어야만 쓰게 된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감자야 그럴때는 십중팔구를 떠올리면 돼."
오잉
"십중팔구라는 말 알지? 그 말처럼 십상팔구라는 한자성어가 있어. 거기서 앞 두글자만 따서 만들어진 단어야.“
"어떻게 알았어?"
"한국어 책에 그렇게 나와있었는데?"
그때는 기분이 묘했다. 대만 사람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니...!
그는 본인이 더 잘 아는 한국어를 찾을 때면 어김없이 나를 놀려댔고, 나는 약 오르면 지는 걸 알면서도 정말 약이 올랐다. 방법은 하나였다. 그가 모르는 중국어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나는 어려워 보이는 중국어를 찾으면 늘 그에게 물어보았다. "너 이거 무슨 뜻인 줄 알아?" 하지만 그는 매번 여유롭게 답을 맞췄다. 그리곤 말했다. "어떻게 자기 나라 언어를 모르겠어~ 한국어를 모르는 감자가 대단한거지!ꉂꉂ(ᵔᗜᵔ)"
그는 나를 놀릴때 진심으로 행복해보였다.
오 이렇게 놀린단 말이지? 두고 보자! 내가 엄청나게 어려운 중국어를 알아내서 널 이겨주겠어!
하루는 中興(중흥)이라는 단어를 보는데 왠지 그가 모를 것 같았다.
"中興 이거 뜻 알아?"
"감자야... 중흥 모르는 대만인 없어. 심지어 대만에 국립중흥대학교도 있어."
이럴수가. 그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고~ 감자 또 못놀렸네! 근데 이걸 물어본 거 보니 감자가 한국어로 '중흥'이라는 단어가 어렵다고 생각했구나?"
정확히 맞춰서 열이 받았다. 나는 그럴수록 그가 모르는 중국어 찾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波斯灣 이게 뭔지 알아?"
그는 말했다. “presian gulf(페르시아만)이잖아.”
나는 좀 치졸해지기 시작했다. “페르시아만이 어느 지역에 어디 어디랑 인접해 있어?”
“어... 뭐야! 이건 중국어랑은 아무 관련 없는 거잖아.”
"빨리 말해봐! 너 이거 모르면 波斯灣 모르는거야.“ 이렇게 우겨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그가 모르는 중국어를 알아낼 수 없었다.
하루는 대만 소설을 읽다가 그가 모를수도 있겠다 싶은 단어를 10개 넘게 적어갔는데 그가 다 알고 있어서 분했다. 그가 마침 abc초콜릿을 먹길래 사실 abc초콜릿은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꼬아서 포장하는 거라고 속였다. 그가 속아서 놀라는 걸 보니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러다 드디어 그에게 복수할 거리가 생겼다.
대만에서 내 전공과 관련된 면허를 취득할 방법을 찾았는데, 면허 취득 조건 중에 기초 대만민남어(대만어. 대만의 국어와는 다르다.)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때 그는 자기는 민남어를 잘 못한다며 특정 지역을 제외한 많은 젊은이들이 민남어에 서툴다고 했었다.
하루는 민남어를 배우는데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보다 중국어를 잘하는 건 틀려먹었으니 언젠가 그보다 민남어를 잘해서 그를 놀려주면 되잖아?!
야심에 차서 민남어를 공부하던 중, 기회가 왔다.
"감자야. 한국인이 쓴 글을 읽었는데 한국인들은 밥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해서 인사말로 밥 먹었어? 라고 묻는다는 거야. 그리고 다른 나라는 안 그렇다고 쓰여있더라."
"어? 근데 대만도 그렇잖아!"
"그니깐! 그러고 보면 한국이랑 대만이 공통점이 참 많아. 신기해."
그가 신기해할동안 내 머릿속에 떠오른 민남어가 있었다. ‘식사 하셨어요?’라는 뜻이지만 인사말로 쓰이는 민남어.
tsia̍h-pá--buē?
내가 외치자 그가 깜짝 놀라 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이거 무슨 뜻인지 알아?"
이제 그가 모른다고 하면 놀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가 왠지 벙찐 얼굴을 하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
"감자가 대만어 하니깐 감동이야..."
오잉.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그는 정말로 감동받을 눈을 했다.
"민남어는 점점 사라지는 언어니깐... 사실 나는 민남어가 진짜 대만의 언어라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그는 민남어에 대해 말해주었다.
한때는 민남어 공부가 금지되고 민남어를 천하다 여긴 시대도 있었어. 라디오와 티비 매체에서도 금지 당했고, 민남어를 쓰는 어린이들에게 수치심을 주려고 판넬을 목에 걸고 다니게 하기도 했어. 민남어를 지키기 위해 투쟁한 역사가 굉장히 길어. 언어가 수난을 겪은 거지. 그런데 법적으로 자유로워진 지금도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며 수모를 당하고 있어.
머쓱해졌다. 나는 그때까지는 민남어가 그저 사투리같은 개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를 놀려주겠다는 요량으로 뱉은 민남어가 그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나 보다.
알고 보니 몇 해 전 돌아가신 그의 외할아버지는 민남어를 구사하셨기 때문에 그는 외할버지와는 제대로 소통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땅에서 나고 자란 가족끼리도 대화가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욱 민남어에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민남어로 그를 놀리겠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덕분에 그날 그의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들을 수 있었다.
잡채는 그가 한국요리를 처음 시도해봤을때 하게 된 요리이다. 그는 잡채가 단연 외국인들이 제일 많이 시도하는 한국요리라고 했다. 그만큼 외국인들이 만든 잡채 영상과 레시피도 많았다.
왜일까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잡채는 맛도 있지만, 그보다 정성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외국음식을 만드는 기분을 내기 좋은 것 같다.
한 번은 잡채에 색을 내려면 노두유를 넣으라는 유튜브 영상을 보았나보다. 그 영상에서 한국 유튜버는 노두유를 사두면 찜닭이나 잡채요리를 할 때 좋다고 했고, 댓글에 노두유가 없어서 색깔이 아쉽다는 분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그 댓글을 보여주더니 빵끗 웃으며 말했다.
나는 대만 사람이라 노두유가 있는데!
어...? 우왕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