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의 암 투병 이야기는 여운이 길게 남아, 독후감을 어디서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 폴이 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이나 행동들이 내가 치료하면서 느꼈던 감정과도 비슷해서 몹시 공감했다. 그는 끝까지 투병했지만 아쉽게도 하늘나라로 떠나 슬펐고, 남아있는 가족들의 무게와 사랑을 느꼈다.
이 책은 아버지가 일간신문의 문화 섹션에서 발견한 책이고, 읽어보라고 추천해준 책이다. 암에 걸린 의사의 암 투병기라는 주제는 나의 관심을 확 끌었고, 평소 암을 극복했던 주변 지인들로부터 여러 조언들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읽고 있던 책이 끝나자마자 다른 읽어볼 책들을 제치로 이 책의 첫페이지를 바로 열었다. 의사이지만 문학을 좋아했던 폴이기에 그의 글은 힘과 흡입력이 있었고, 의사로서의 정직함과 환자로서 진실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덕분에 몰입해서 단숨에 다 읽었고, 폴의 병세가 쇠약해지는 시점부터는 나도 함께 울었다.
폴은 의사와 문학가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의사라는 직업을 정하고, 머리로 배운 의학지식을 뽑내는 우쭐한 레지던트 신참에서부터 좌충우돌 경험을 통해서 훌륭하고 사명감 깊은 의사로 거듭 성장했다. 폴은 본인의 실수들을 스스럼없이 글로 적으며 반성하고 깨우치고 성장해 나아가는 모습 보여준다. 그의 성장은 의학적 지식 중심에서 환자 중심의 치료와 공감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불현듯, 내가 격었던 나쁜의사(에피소드 2 참고)도 머리 속에 떠올랐다. 폴은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는 대목은 폴이 스스로 의사 윤리를 정립과정을 보여준다.
전반부의 대부분은 신경외과 전문의로서의 성장과정을 매우 생생하게 다뤘다. 해부학을 배웠던 내용, 생생한 뇌수술 장면들, 환자의 생사나 장애를 결정했을 때의 비장함, 환자의 생명에 영향을 줄뻔했던 실수나 진지한 수술 결과를 전달하는 중에 느끼는 원초적인 만족감 등은 어디에서나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였다. 마치 폴과 함께 레지던트를 수료한 느낌이었다.
전반부는 의학성장 드라마를 보는 듯 했다면, 후반부는 폴이 의사에서 환자로 투병하는 내용으로 담겨있다. 폴의 병색이 짙어지면서 나도 함께 안타까웠는데, 암 선고, 세포독성 항암 투약, 그로 인한 부작용 등은 나도 경험해 본 내용이라 얼마나 힘들지 공감하면서 읽었다.
폴은 첫번째 항암약 (표적항암제)이 아주 잘 들어서 성공적으로 레지던트 생활에 복직했고, 이후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본인의 목표한 곳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암이 재발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가게되었다. 나 역시 암의 재발을 막기위해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하고 있지만, 복귀 후 스트레스가 커져 혹여 ’암이 재발된다면 어떻하지‘하는 걱정을 많이 하고 있으니 폴의 이야기는 나에게 업무의 속도를 조절하는 도움이 될 것이다.
폴은 자신이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담당 의사에게 묻는 장면이 나온다. 2년이 남았다면 글을 쓸 것이고, 10년이 남았다면 수술을 하고 과학을 탐구하겠다고 밝힌다. (p236). 나 역시 죽음이 2년이 남았다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일에 몰두할 것이고, 10년이 남았다면 무엇을 탐구하고 싶을까? 더 길게 남았다면? 현재 하고있는 회사생활보다는 의미있는 연구나 탐구를 하고 싶다. 찾아보자.
또한, 폴은 환자이자 의사였고, 그 사이의 갈등에서 부단히 버둥거리는 장면은 죽을병에 걸린 의사가 아니면 격기 어려운 감정들이다. 전반부에 의사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자세히 적은 이유도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함이였을 것이다. 그는 결국 문학을 택하게 되는데,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웠음을 직감했으리라. 나 역시, 암 선고를 받은 초기 불안감과 무기력함을 글로 게워낼 수 밖에 없었다. (에피소드 27 참고) 폴이 말하는 문학 또는 그의 책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문학을 선택했을 때 한없이 평화롭다고 말한 그의 느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나의 그것과 매우 비슷했다.
‘병을 앓으면서 겪게되는 종잡을 수 없는 건 가치관이 끊임없이 바뀐다는 것이다. 환자가 되면 자신에게 중요한 게 뭔지 알라내려고 계속 애를 쓰게 된다. (p236)’ 나 역시 짧은 시간내에 가치관이 180도 바뀌었고, 나에게 중요한 게 뭔지, 가치있는 삶은 무엇인지 등을 알아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폴 부부의 아이가 태어난 날, 폴은 아이를 안아보고 싶지만 몸이 너무 차가워서 갖 태어난 아이를 안아보기를 두려워하는 모습에서는 눈물이 났다. 또한 무의미한 삶의 연장 대신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폴의 결단에 경의를 표했다.
이 책의 마지막 장, 즉, 폴의 마지막 순간은 아내 루시가 작성했다. 더불어 남아있는 사람으로서 슬픔을 이겨내는 용기와 루시가 보는 폴의 모습들을 담담하게 적어냈는데, 부부로서 서로 얼마나 존중하고 사랑했는가를 보여준다. 이 책은 폴 입장에서는 미완성 작품이나 루시의 마무리로 인해 그 어떤 완성작보다도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되었다. 단언컨대, 이 책은 최근 읽은 책들 중에 베스트이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