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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Oct 19. 2021

나를 위해 하루를 잘 살아내기

우울증은 남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냥 곁에 있어주는 것 필요한 게 있는지 하고싶은 게 있는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는지 안부를 묻는 것 뿐. 그리고 남이 판단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우울증인지 아닌지 치료가 필요한지 아닌지 뭘하면 도움이 될지 아닐지는 남이 판단해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어느 한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이 아주 작은 신호를 감지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 사람의 결정이다. 어느 선택을 하던 그 사람의 선택이고 결정이다.


시간이 가면 이것 또한 지나간다, 더 나아질 수 있다,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원래 알아서 잘 하는 사람이니까. 물론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위로할 지 몰라 자신들이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의 말을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쩔 때는 정말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위로로 다가오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지금 힘든데 이게 언제 지나간다는 건지 지금 내 상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나아진다는 건지 내가 그동안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는데 뭘 원래 알아서 잘 한다는 건지.


그래, 그 위로에도 상당한 위안을 받고 주위사람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나를 위해 써준 시간과 관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응원받고 힘을 얻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 또한 정말 대단한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중심이 되어 스스로를 챙기고 보호할 줄 아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단지 내가 그런 사람이 못 되었을 뿐이다.


마음이 너무 아플 때는, 그 때는 내 시간이 멈춰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냥 그럴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몰라주는 것 같고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암흑 속으로 빠져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 마음의 정도나 깊이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상심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였다. 그래도 괜찮은 거라는 말이 듣고 싶을 수도 있지 않을까...


수렁에 빠진 마음을 햇빛에 잘 쬐어 잘 말려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결혼 수업에서 코치님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 내용은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루에 적어도 세가지씩 해보는 것(Self-care)이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도와줄 수 있는 일들. 내가 죽어도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면 그래도 해보자.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는 동안에는 아무 방해받지 않고 최대한 집중하고 최대한 즐기는 것.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뭔가를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채워야 한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바로 준비를 해본다던지, 인테리어 계획을 세우고 물건을 싹 다 정리해본다던지, 지금 당장 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실천에 옮기는 거다.


거창한 일이 아니라 커피 한잔, 하늘 올려다보기, 음악 들으면서 천천히 걷기 같이 아주 소소하더라도 확실한 행복을 주는 일들을 시간을 내서 하기. 고된 일상에 지쳐갈 때 즈음 기분전환 삼아 쉬어가기.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힘들땐 펑펑 울기도 하고 귀여운 동물들 사진을 보면서 미소짓기도 하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짤들 보면서 소리내서 웃기도 하고. 글쓰기나 미술, 공예, 음악, 춤이나 운동 등 자신을 창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도 하나씩 도전해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내 마음을 조금씩 알아챌 수 있다면 내가 어떤 상태인지 어떤 기분인지 어떤 마음인지 내가 인식하고 대응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미래의 행복을 현재에 가져와서 지금 그 행복함을 누려도 될 것이다. 내가 주말에 카페를 가고 싶었다면 오늘 가도 된다 그게 오늘의 나를 행복하게 느끼도록 도와준다면. 내가 내년에 이사를 가고 싶었다면 오늘 이사가는 것 처럼 짐정리를 해도 된다 그게 오늘의 나를 움직이게 만들어준다면.


마음의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봐도 좋다. 조금씩 마음이 풀린다면 다음 주, 마음이 조금 더 안정되었다면 다음 달, 내 마음이 더이상 불안에 요동치지는 않고 편안한 기분이 잠깐씩 느껴진다면 내년... 이런 식으로 앞으로 기대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 지금은 내가 조금씩 나아지는 시기이니까 나는 점점 더 잘 될 거니까. 미래에 행복할 수 있는 일들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불행해 죽는 거 아니면 행복한 일이다 하기싫어 죽는 거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이다 기분 나빠 죽는거 아니면 기분 좋은 일이다. 지금 당장 죽는 거 아니면 평온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동네를 걷거나 공원을 산책하거나 할 수 있을 정도의 용기도 내었고, 거울을 마주할 용기가 생겼을 때에는 제일 마음에 드는 옷을 입어본다거나 팩이나 화장, 머리까지 조금씩 꾸며볼까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고 셀카도 찍고 창밖 풍경이나 커피잔도 사진으로 기록을 남길 수 있을 정도로 하루하루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 옷도 내가 가지고 있는 옷들 중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입었다. 내가 평소에 자주 입는 옷으로 사람들이 나를 떠올릴텐데, 하루종일 집에만 있어도 후줄근한 옷 말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리고 점점 공포감을 덜 느끼며 점점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으며, 락다운 상황에서부터 1년이 지나 코로나 규정이 완화될 즈음해서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업무까지 해낼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출근길에 매일 같은 버스를 기다리며 만나는 사람들, 점심시간에 단골 음식점에서 먹는 한식, 퇴근길에 일부러 돌아가서 공원에 가보면 잔디밭 위에서 강아지들 산책 모임 구경하기.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에서 특별한 요소를 일부러 하나씩 만들어갔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점이다. 해볼까? 라는 마음이 들면 정말정말 좋은 신호이다. 나에게 희망이 열정이 피어났다는 증거. 에이 내가 뭘... 지금은 좀... 이런 생각이 들기 전에 질러야 된다. 해볼까? 그리고 바로 하면 된다. 놀러 가볼까? 팀장님께 이 아이디어 제안해볼까? 수업을 들어볼까? 오래전 친구에게 연락을 해볼까? 모임에 나가볼까? 그거를 해서 내 마음이 조금 위안을 받는다면 내 기분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진다면 해볼만 하지 않는가. 


만약에 잘 안된다고 해서 벌어질 최악의 상황은 뭐 내가 좀 쪽팔리는 것 밖에 더 있겠는가. 그냥 머쓱한 거지 조금 창피한 상황인거지 그 순간을 넘기면 지나가는 일인 것이다.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믿었던 내 인생 전부를 바쳤던 사람인 남편에게도 심적으로 후두려맞고도 안죽고 살았는데 뭐 그정도 쯤이야. 또 쓰러지거나 엎어지면 다시 일어나야지 뭐.


깎아도 깎아도 계속 자라나는 손톱처럼 뽑아도 뽑아도 계속 나는 눈썹처럼 아무리 고데기로 펴놔도 구불거리는 곱슬머리처럼 밥먹으면 똥나오고 과식하면 살찌고 운동하면 건강해지는 것처럼. 자연의 섭리를 무슨 재주로 거스르겠는가. 손톱이 안자라게 할 수 있는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손톱을 언제까지 안 자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손톱이 나에게 상처주려고 자라고 있는 것도 아니고. 손톱이 길었다고 내가 실패자도 아니고. 


그 작은 손톱도 꾸준히 자라나는데 나도 계속해서 정진해야 한다. 앞으로 내가 겪게 될 수 많은 상황들에도 내가 부러지고 깎여도 내가 송두리채 뽑혀도 그 자리에서 다시 자라날 수 있어야 한다. 내 손톱도 나를 위해 그래주는 것처럼. 내 몸 하나하나가 나를 위해 운영되는 것처럼. 나도 할 수 있다.







결혼 수업에서 추천하는 또다른 방법은 감사할 일들을 찾는 것(Gratitude)이다. 아주 사소하고 당연하다고 느껴졌던 일들도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지만 평범했던 일상이 특별해진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우울감에 짓눌려있는 마음이 커서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아도 그냥 아 이런 것에 감사하다 하고 입밖으로 내뱉은 것만으로도 변화를 가져온다. 


퇴근하고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어서 감사하다. 월세면 어떻고 낡았으면 어떻고 더러우면 어떤가 누가 뭐라해도 내 집이고 내 공간이다. 일단 감사할 수 있다. 우리 집에 전기가 들어와서, 수도가 나와서, 냉난방이 되어서 정말 감사하다. 핸드폰이 있어서 감사하고 인터넷에 연결되어서 감사하다. 느려터진 데이터라도 오래되서 꾸진 핸드폰이라도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가 되어준다. 그러니 이것 또한 감사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이 너무 힘들고 짜증나고 나만 뒤쳐진 것 같이 느껴지고 억지로라도 감사해야 할 일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일상에서 작지만 반짝거리는 순간들이 매일매일 스쳐지나가지만 내 마음이 너무 지쳐서 지금 당장 눈 앞에 있는 걱정거리 말고는 생각할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 의식적으로 그 찰나의 순간들을 찾아내어 기록한다면, 온통 부정적인 생각에 신경을 곤두세우다가도 잠시 공기를 환기시쳐 숨 돌릴 수 있도록 한다면, 어느 순간 내 인생도 어떻게 보면 살만 하다고 느낄 정도까지 여유가 생길 것이다.




내가 어거지로 쥐어짜서라도 생각해내기 위해 만든 목록


1. 오늘 가장 소중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2. 오늘 누가 가장 고마웠나요?

3. 오늘 어떤 대화 / 만남 / 사건들이 가장 의미 있었나요?

4. 오늘 내가 가진 것들 중 어느 것이 가장 도움이 됐었나요?

5. 오늘 내가 배운 깨달음은 무엇이 있었나요?

6. 오늘 있었던 일 중 가장 좋은 일은 무엇이었나요?

7. 오늘 나에게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은 일은 무엇이었나요?

8. 오늘 하루를 보내고 나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요?

9. 새롭게 시작하는 내일을 보람차게 보내려면 어떤 일들이 있길 바라나요?

10. 내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감사하다고 느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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