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은 ‘프로페셔널’의 진짜 의미
(커버: Unsplash의Phil Hearing)
5화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전문 번역가’와 ‘번역하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 나는 어떤 걸 하고 싶은 걸까?”
이 질문을 나에게 던져봤다. 나만의 개념 정의가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이렇게 답했다.
전문 번역가는 ‘번역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인’이고, 번역하는 사람은 ‘번역을 통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세상에 전달하려는 사람’이다. 전자는 번역료가 주 수입원이며 번역이 직업적 정체성의 핵심인 반면, 후자는 번역이 생계 수단인지 여부보다 ‘이 텍스트가 지금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우선순위에 둔다. 따라서 후자에게는 ‘왜 번역하는가’가 중요하고, 자연히 ‘무엇을 번역하는가’가 결정적이다.
이렇게 나만의 개념을 구분 짓고 나니, 결국 이런 질문으로 귀결됐다. 번역은 나에게 ‘직업’인 것일까, ‘활동’인 것일까? 여기서 ‘활동’이란 꼭 사회운동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기술을 사회적 필요나 공적인 목적에 도구로 내어주는 의미 있는 실천을 뜻한다.
1화에서 밝혔듯, 2015년에 내가 처음 번역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는 ‘전문 번역가가 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활동가로서 필요한 텍스트, 중요한 외국 기사와 논문을 번역해서 내가 속한 사회운동 단체 내에서 기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일감을 찾아다니는 다른 지망생들과 달리 나에게는 번역할 텍스트가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세상에 꼭 내놓아야 할 텍스트들이 이미 줄을 서 있는 게 문제다. 전문 번역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2024년부터 지금까지의 2년간도, 번역 자체를 안 하는 날은 없었다. 그게 ‘전문’ 번역가로서의 번역이냐, 단체 ‘활동’으로서의 번역이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본업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에 ‘전문 번역가 되기’라는 목표를 세우게 됐고, 2025년에는 2026년 초에는 꼭 본업을 그만두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 과정에서 ‘왜 번역하는가’라는 원래의 동기가 조금씩 흐려졌던 것 같다.
번역‘만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면 아예 직업으로서의 번역은 포기하는 선택지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책이 좋고, 출판 번역이 좋아서 계속하고 싶었다. 특히 논픽션 번역을 계속하고 싶었다. 5화에서 그 이유는 이미 얘기했었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장기적 안목과 깊이 있는 사고를 돕는 논픽션은 여전히 중요하고, 나는 그런 책을 번역하고 싶다.”
만약 번역‘만으로’ 먹고살겠다고 결심했다면 영상 번역이나 게임, 웹툰, 기업 문서 같은 산업 번역도 병행하는 것을 고려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됐을 것이다. 실제로 고민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나 자신을 돌아보면, 나는 드라마를 거의 안 보고 게임이나 웹툰도 즐기지 않는다. 돈을 위해 재미없는 텍스트를 붙들고 있는 것은 그만두려는 본업보다도 재미없을 것 같았다. 나는 책이 좋다. 정확히는 ‘롱폼(long-form)’이 좋다. 내가 번역하는 논문도 학술 논문의 엄격한 틀을 갖춘 것이라기보다는, 활동가와 지식인 모두를 겨냥한 긴 글에 가깝다.
책 중에서도 논픽션이 좋다. (두 번째 번역서인 《영국은 나의 것》이 픽션이라 조금 겸연쩍긴 하지만, 읽어보면 내가 그 책을 왜 좋아하며 번역 출판까지 제안하게 됐는지 느껴질 것이다.)
논픽션 중에서는 카테고리를 가리지 않고 고루 좋아하는 편인데, 최근 〈디스이즈텍스트〉 논픽션 북페어에 가서 산 책들을 보면 그게 잘 드러난다.
《천문대에 피아노가 떨어졌다》부터 《조선의 퀴어》, 《임진전쟁과 민족의 탄생》, 《미국의 우생학》까지. 역사, 퀴어, 노동, 예술, 과학, 디자인…. 나쁘게 말하면 관심사가 중구난방이지만, 좋게 말하면 내가 논픽션 출판 번역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을 통해 이토록 다양한 세계를 깊게 만날 수 있다는 것.
2024년에 강주헌 선생님 강의를 들을 때, 선생님이 ‘자기 계발서’에 대해 애서가들이 갖는 편견을 지적하신 적이 있다. 속으로 뜨끔하면서도 크게 공감했다.
그 후 1년쯤 지난 2025년 초 우연히 만난 편집자 한 분이 자기 계발서 번역을 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솔직히 말해 먼저 든 생각은 ‘번역서 목록을 쌓아야 하니 내용이 완전히 별로만 아니면 해야지’였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니 인간관계에 관한 유익한 대중 심리학 서적이었고, 내가 독자로서도 사볼 것 같은 책이었다. 결국 못 하게 됐지만, 나중에 출간된 걸 보니 인터넷 서점 분류상으로도 ‘자기 계발’이면서 동시에 ‘인문학’이기도 했다. 강주헌 선생님 말씀처럼, 내 안의 편견을 거두고 본다면 이 카테고리 역시 충분히 매력적인, ‘활동’으로서의 번역이 될 수 있음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나에게는 번역할 텍스트가 부족한 게 아니라 쌓여 있다. 문제는 그것이 당장 경제적 수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얼마 전 단체 내에서 한 분께 제안을 받았다. 영미권 노조 활동가들의 이주민 조직 매뉴얼을 찾아보고 번역해서 내부 회람하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내가 생각 못 했던, 번역으로 기여할 수 있는 또 다른 좋은 일이었다. 형식상으로는 ‘산업 번역’의 외피를 썼지만(‘매뉴얼’이니까) 본질은 운동의 필요에 응답하는, ‘번역으로 기여하고 싶은’ 활동이다.
지금 (돈을 받고) 작업하고 있는 책이 두 권 있다. 먼저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을 지지하고 관련 정보를 주는 책이 하나 있다. 그리고 번역이 무산됐다고 생각해서 ‘번역 출판 기획서를 닫으며’에 관련 글을 썼던 책이라 겸연쩍지만, 일란 파페의 《Israel on the Brink》도 결국 번역 작업을 하게 됐다. 물론 둘 다 내가 기획서를 보낸 책이다. 이런 책들은 독자층이 상당수 존재하며 출판사도 관심을 갖는다(제발 잘 팔려야 할 텐데...).
내 첫 번역서 《전후 공산당의 배신》은 더 전문적이다. 스탈린주의 정당들의 배신과 유러코뮤니즘으로의 전환을 분석한 이런 역사 이론서는 소수 활동가만이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지금 한국 상황에서 절실히 필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어떤 책은 출판사가 먼저 제안하고(대중 심리학), 어떤 책은 내가 제안해 독자를 만나고(일란 파페, 트랜스젠더 청소년), 어떤 책은 독자가 적더라도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전후 공산당의 배신). 이 모든 책이 필요하고, 나는 이 모든 종류의 번역을 좋아한다.
내가 전문 번역가가 되려 한다고 했을 때, 단체 내 한 선배가 응원하면서도 경고했다. 적당히 진보적인 책을 번역하면서 그게 곧 사회운동이라고 자족하는 함정에 빠지지 말라고.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출판사와 계약한 번역에만 시간을 쓰다 보면, 정작 내 정치관에 정확히 맞고 ‘내가 아니면 안 되는’ 번역은 뒷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 청소년 관련 책이나 《Israel on the Brink》 같은 책도 중요하고 한국에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단체 내 번역을 뒷전으로 미루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나는 ‘직업’ 번역가는 될지 몰라도,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은 잃는 셈이다.
‘전문’이라는 타이틀에 집착해 번역‘만으로’ 생계를 꾸리려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사회운동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출판 번역은 본래 수입이 적은 일인데, 그 적은 수입에 생계를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돈이 되는 번역’을 우선할 수밖에 없고, 결국 오히려 번역하고 싶은 텍스트를 선택할 자유를 잃는 아이러니에 빠지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본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때, 나는 경제적 압박 없이 진짜 필요한 번역을 선택할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다양한 논픽션을 사랑하는 독자이며, 번역가로서 다양한 책을 탐험하고 싶다. 이 모든 열망이 내가 계속 출판 번역을 하고 싶은 이유다. 다만 이것이 ‘전부’가 되어 단체 내 번역이 밀려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야 할 뿐이다.
원래 내가 목표했던 ‘전문’ 번역가는 번역료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의 어원을 찾아보면, 원래는 ‘생계’나 ‘직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말이 아니었다.
프로페셔널이라는 단어는 전문가를 가르키는 말로 19세기 후반에 주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어원은 고대 프랑스어의 프로세스(Profess)와 라틴어 프로페시오(Professio)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의미는 ‘선언하는 고백’ 또는 ‘공개적으로 선언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고백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른 사람’, 교수를 프로페서(Professor)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공적인 장소에서 선언하는 것, 지식을 고백하는 것은 누구가를 가르치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 말입니다. 실제 ‘전문 직업’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였는데요. 프로페스는 ‘프로(Pro: Before)’와 페스(fess : confess)’가 결합되어 ‘앞에서 고백하다’, ‘공공연히 말하다’라는 의미로, 프로페셔널은 여러 사람에게 공적으로 가르칠 수준의 사람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에서는 프로페셔널은 고도의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달인,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지요.
SW장인 시리즈② 프로페셔널의 조건과 SW 장인정신 (조남호)
그렇다면 “공적인 장소에서 지식을 나누는 행위”가 프로페셔널의 본래 의미라면, 나 또한 그 길 위에 이미 서 있는 것이 아닐까. 비록 번역료로 먹고사는 직업인의 요건을 다 채우지는 못했을지라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지식을 공적으로 나누겠다는 고백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면 말이다.
나는 이미 번역하는 사람이고, 돈 받는 번역도, 돈이 안 되는 번역도 계속할 것이다. ‘번역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니 내가 나아가야 할 길도 분명해졌고, ‘번역하는 사람’과 ‘전문 번역가’가 칼같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알게 되었다.
4화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10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전문 번역가가 ‘되어가는’ 중이지, ‘된’ 건 아니”라고. 이제 이 문장을 조심스럽게 다시 써본다.
전문 번역가로 가는 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이미 ‘된’ 것이었고, 동시에 여전히 ‘되어가는’ 중인 것이기도 하다고.
결론은 같다. 어쨌든 나는 계속 걸어간다. 꾸준히 걸어가면, 언젠가는 도착한다고 믿으면서.
이 시리즈는 ‘전문 번역가가 되는 과정’을 기록하려고 시작했다. 하지만 본업을 유지하기로 마음을 바꿨고, 그것은 번역료만으로 생계를 꾸리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밟지 않겠다는 뜻이다.
앞으로 쓸 이야기는 ‘번역으로 먹고사는 법’이 아니라 ‘본업과 번역을 병행하며 사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그래서 이 시리즈 성격에 맞지 않다). 그래서 용두사미 같은 찜찜함이 남지만, 그럼에도 이 시리즈는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맞을 것 같다(브런치 시스템상 ‘완결’로 바꿀 수가 없지만).
읽어주신 분들께 죄송한 마음이지만, 이 마침표가 또 다른 시작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