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여정 day19 - 목소리
어릴 때 할머니댁에서 사촌언니와 둘만 할머니댁에서 같이 잔 날이 있었는데, 사촌언니가 할머니께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할머니께서는 좀 당황하시는 것 같더니, 할머니가 아는 이야기가 없어서 해줄 이야기가 없다고 하셨다. 살짝 당황한 사촌언니는 그럼 할머니 어릴 때나 기억나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할머니께서 해주신 이야기는 6.25 전쟁 때, 피난을 다니시던 이야기였다.
1920년대생이신 할머니께서는 결혼해서 부산에서 살고 계셨는데, 전쟁이 터졌을 때, 정말 무섭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셨다. 부산까지 전선이 밀려 초토화되어서 산에 땅을 파서 숨어 있기도 하고, 먹을 게 없어서 힘들게 식량을 구해서 먹기도 하고,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우셨다며 몇몇 떠오르는 장면을 이야기해 주셨다.
나도 엄청 어릴 때였는데,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걸 보면, 놀랍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렇게 힘들게 피난을 다니고, 힘겹게 살아남아 아빠를 잘 키워 주시고, 나도 잘 돌봐 주시고, 반겨주시고, 사랑과 정성으로 우리 가족을 책임지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대가족의 장남이셨는데, 미군부대에 전기 관련 일을 배워서 고모할머니들과 여러 가족을 다 시집/장가보내고, 집안도 일으키셨다고 했다. 어릴 때 집에 오시면, 내 방에 불 스위치나 전자 기기들을 잘 고쳐주시고, AFKN을 항상 듣고 계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께서는 기계도 잘 다루시고, 어학도 잘하셨던 것 같다.
사실 할아버지 목소리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할머니 목소리도 희미하지만, 다시 한번 할머니 얼굴을 보며 목소리를 듣고 싶다. 이제는 맛있는 것도 사드릴 수 있고, 좋은 곳에도 보내드릴 수 있고, 시간도 같이 더 많이 보낼 수 있는데, 할머니가 더 이상 이 지구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 속상하게 느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