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리 꾸미기가 다시 인기라니. 트렌드는 정말 돌고 도나 봅니다. 문구점을 지나칠 때마다 ‘다꾸’ 코너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설레더라고요. 교복을 입고 다니던 그 시절, 다이어리 꾸미기에 심취해 있던 소녀가 생각나서 말이죠.
매해 12월이면 서점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다이어리 매대가 있었습니다. 다음 해를 함께 할 다이어리를 고르는 일은 신중하고 또 신중히 진행되어야 했어요. 사실, 속지의 내용들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하지만 색감과 디자인은 절대 놓칠 수가 없었어요. 취향에 맞는 캐릭터가 있는지 여부도 중요한 선택 요소였죠.
고심 끝에 다이어리를 선택했다 하더라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다이어리를 꾸며줄 액세서리가 필요했어요. 다이어리에 먼지라도 묻을까 봐 커버도 구매해야 했고, 소중한 다이어리가 허전하지 않게 키링도 달아줘야 했어요. 다이어리의 외관이 중요한 만큼 내부도 중요했습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분위기를 바꿔줄 수 있도록 각양각색의 스티커도 붙여줘야 했어요. 여행 가는 일정이 생기면 비행기 스티커 하나쯤은 붙여주는 것이 필수였고, 글씨 굵기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그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펜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학창 시절의 퉁퉁했던 필통은 공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이어리 꾸미기를 위한 것이었을 지도요.
그렇게 꾸민 다이어리, 나만 보기는 너무 아깝잖아요. 기꺼이 친구들에게도 오픈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다이어리도 진지하게 분석했어요. 친구들의 다이어리에서 벤치 마킹 할 것은 없는지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죠. 이 스티커는 어디서 샀는지, 글씨는 어떻게 꾸몄는지 빠르게 스캔하다 보면 질투가 나기도 했어요.
친구 다이어리에 적혀 있는 명언들이 부럽기도 했어요. 나도 그럴싸한 명언 하나쯤 폼 나게 기록해두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폼 나는 문구’는 이런 내용이었어요. ‘지난달에 무슨 고민을 했었지? 작년 이맘때에는? 기억이 나지 않지? 지금의 고민도 그렇게 잊힐 거야.’라는 내용이었는데, 한창 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시기라 그런지 훅 하고 마음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런데 참 재밌지 않나요? 사실 다이어리는 내 계획을 기록하고 내 생각을 정리하려고 필요한 거잖아요. 그런데 계획은 세우지 않고 꾸며요. 꾸미고 자랑해요. 친구들 다이어리와 내 다이어리를 비교해요.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는 다이어리다 보니, 내 다이어리에 내가 솔직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성적을 올리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짠다고 해 봅시다. 현재 내 점수가 공개하고 싶지 않은 수준이에요. 그래서 목표 점수를 높게 잡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내 다이어리는 쉽게 오픈하게 되는 공공재 같은 느낌이에요. 이 다이어리에 어떻게 솔직해질 수가 있겠어요?
다이어리 꾸미기에 진심이었던 만큼 내 다이어리는 예뻤지만, 예쁘기만 했어요. 뭔가를 열심히 적어서 늘 화려하게 빼곡했지만, 그래서 나 자신이 계획을 잘 세우는 사람인 줄 알았지만, 다이어리에는 내 것이 없었어요. 맞아요. 다이어리가 아니었습니다. 진짜 계획을 세울 수도, 진짜 일기를 쓸 수도 없는 다이어리가 어떻게 진짜 다이어리라고 할 수 있겠어요.
다시 다이어리를 고르고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다이어리는 그 시절의 다이어리와는 많이 달라요. 종종 스티커를 붙이고 꾸미기는 합니다만, 내가 보고 웃기 위해서입니다. 필기구는 아끼는 펜 하나예요. 글씨체? 불행인지 다행인지, 악필도 이런 악필이 없는 수준이라 다른 사람은 알아보기 힘듭니다. 예쁜 글씨, 이런 건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소위, 안 예쁜 다이어리입니다.
그래도 지금의 다이어리는 진짜 다이어리예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다이어리가 아니기 때문에 진짜 계획을 세울 수도, 진짜 일기를 쓸 수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보여주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어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봐요. 그 당시 내가 제대로 계획을 세울 줄 알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라고요.
!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나요? 그 계획에 대해 만족하고 있나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표를 잡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