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서점 한편에 자리 잡은 문구 코너에 가면, 정말 말 그대로 눈이 돌아갑니다. 아직도 디지털보다 아날로그 감성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 엄마는, 형형색색의 펜들도 다양한 크기의 지우개도 심플한 디자인의 필통도 다 갖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코너는 역시나 다이어리예요.
다이어리의 종류는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계획을 세우는 만큼, 디자이너들도 니즈에 맞춘 색다른 계획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어요. 한 해를 다 담은 다이어리는 달력을 연상하는 면도 있고, 일주일치를 담은 면도 있고, 줄 눈만 있는 면도 있고 그야말로 종합장입니다. 그 외에 주간 다이어리도 있고, 용돈 다이어리도 있고, 감사 다이어리 같은 특정 주제를 기록하는 다이어리도 봤어요.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책상 위에 늘 주간 다이어리가 탁상 달력처럼 세워져 있었어요. 주간 일정을 내가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워낙 컸고, 내가 하루에 이만큼 일을 한다는 것을 은근히 주변 사람들에게 노출할 수 있는 효과도 있었죠.
언젠가부터는 한 페이지 당 하루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수첩에 시선이 가더군요. 가벼우니 휴대가 편하기도 했어요. 슬슬 “그게 뭐였지?”를 중얼거리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별것 아닌 사항들도 다이어리에 기록했어요. 오늘 하루에 해야 하는 리스트가 제법 길어지더군요.
하루는 거의 다 써가는 수첩을 첫 페이지부터 넘겨보았습니다. 그동안 뭐가 이렇게 바쁘게 살았나 싶어서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분명 페이지 상단에 쓰여 있는 날짜는 다른데, 리스트 내용이 같은 날이 많았던 거예요.
그것도, 꽤!
다이어리를 오래 쓰다 보면 자기만의 표기법이 생깁니다. 하루 중 가장 중요한 항목, 피치 못한 사정으로 내일로 미뤄야 하는 항목, 이번 달 계속 유념해야 할 항목,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 늘 하단에 기록되는 항목 등 내 스타일에 맞게 항목별로 위치도 달라지고 표시법도 달라집니다. 그런데 유독 내일로 미루는 것을 뜻하는 화살표 표시가 너무 많았어요. 한 가지 항목이 일주일이 넘게 계속 화살표로 다음날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도대체 뭐 길래? 하고 확인해 보니, 막상 별것도 아닙니다.
어떤 것은 너무 아무것도 아닌 거라서, 어떤 것은 오랫동안 신중하게 고민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인데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서 등 계획이 내일로 미뤄지는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어떤 날은 실행하기 쉬운 것들만 잔뜩 늘어놓고, 한 시간 만에 모든 것을 해치웠다며 만족했던 날도 있었습니다. 일단 찍찍 그어진 오늘의 to do list 항목들을 쳐다보기만 해도, 내가 오늘 하루를 환상적으로 보냈다는 자아도취에 휩싸이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런 수준의 리스트라면, 굳이 기록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뿌듯해할 가치도 없어요.
애당초 계획을 세울 때 진지하게 실행할 생각이 없던 거였어요.
마치, 계획표를 위한 계획표랄까.
수첩을 끝까지 넘기다 보니, 이 수첩과 함께한 내 시간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빼곡히 채워진 리스트가 자랑스럽기보다는 나만 알고 있는 치부를 확인한 것 같았거든요. 다이어리를 써온 지도 벌써 몇 년째이고, 계획 세우기에는 나름 경력자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 오늘, 어제와 같은 계획표를 실행하고 있나요? 오늘과 내일의 계획표가 달라지려면, 오늘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 생각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