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밝히는 할매

그 '정자'가 그 '정자'였어?

by 김여은


잊을 수 없는 여름밤이 있다.


동네 아줌마들과 꼬맹이들의 놀이터였던 사거리 쌀가게 앞. 일곱 살 김여은도 그날 거기 있었다. 목욕탕 의자 하나를 깔고 앉은 채 오빠와 '하나 빼기'였나 '쌔쌔쌔'였나, 아무튼 시시한 놀이를 하던 중- 쌀가게 맞은편 개미슈퍼에서 9시 뉴스 시그널이 들려왔다. 어라, 왜 벌써 9시지? 어쩐지 졸립더라. 나와 오빠는 동시에 눈을 비볐고, 오빠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 나 가서 잘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수많은 아지매들 중 쌀가게 주인 할머니께만 인사를 건네는 오빠. 오빠는 어려서부터 권력을 알았다...가 아니라 그 주인 할머니가 우리 할매였다. 그래, '우리' 할매. 나는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 그 할매가 '우리'의 할매라고.


"그래, 피곤할 텐데 어여 가서 자.

선풍기 틀고, 더워도 배에는 이불 꼭 덮고! 알았지?"


오빠는 고작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했을 뿐인데, 대답이 참 길다. 다정한 울할매. 어쩜, 세심하시기도 하지. 할매는 그 후에도 자기 전에 찬물 마시지 말라느니, 모기향을 꼭 피우라느니 하는 잔소리를 덧붙였다.


그리고... 드디어 일곱 살 김여은의 차례. 애교 많던 그 꼬맹이는 할매한테 다가가, 부러 더 혀 짧은 소리로 귀엽게 말했다.


"할머니 나두 가께요. 안녕히 두무시고 돟은 꿈 꾸데요~?"


누가 봐도 손주보다 훨씬 깜찍한 인사였다. 누가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랬다. 하지만... 쌀가게 임 여사 님은 말썽쟁이를 훈육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오빠 자게 시끄럽게 하지 말고!"


그날, 난 깨달았다.

할매는 결코 '우리' 할매가 아니라는 걸.




XX 염색체를 가진 그녀의 삶은, XY 염색체를 위한 희생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 그리고 손자까지. 그건 정말이지 맹목적인 사랑이었다. 아무리 시대가 그런 시대였다지만, 나는 그녀가 왜 그렇게까지 그들을 위해 헌신했는지 지금도 영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름이 '정자'이기 때문일까? 대체 그녀의 아버지는 어쩌자고, 딸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줬던 걸까. 사람은 이름 따라 산다던데, 그래서 그녀는 그토록 XY 염색체에 관대했던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그녀로 인해 일곱 살의 김여은은 서럽게 울어야 했고, 열일곱의 김여은은 투쟁했다. "딸기 다 먹지 말고 오빠 거 냄겨 놔!" 하면, 억지로 꾸역꾸역 마지막 한 알까지 입에 넣기. "선풍기 오빠 쪽으로 좀 해줘~" 하면, 보란 듯 내 쪽으로 고정하기. 뭐 그런 식이었다. 돌아보면 하찮기 그지없는, 하지만 당시엔 정말 비장했던 나의 투쟁사.


그리고 스물일곱의 김여은은 할매를 놀려먹기 시작했다. 그 무렵 할매는 경로당을 다니면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유난히 딸을 둔 엄마들이 많았던 건지 집에 돌아오면 이런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에휴, 이래서 딸이 있어야 되는 건데...

나는 아들만 둘이라서 외롭다."


그러면 나는 신이 나서 깐족거렸다. "왜! 언제는 아들이 최고라며. 삼촌이 딸만 셋이라 불쌍하다며!" 이마를 한껏 늘리며, 살살 웃어가며 약을 올리면 할매는 멋쩍은 듯 웃으면서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들도 있긴 있어야지~"



그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라 생각했다. '아들이 있어야지'에서 '아들도 있어야지'로 바뀌었다는 거.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그리고 할매의 변화는 제법 진심 같았으니- 몇 해 전 새언니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다.


"할매. 솔직히 말해 봐.

증손주가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딸이었으면 좋겠어?"


할매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둘 다 좋지! 건강만 하면 돼~"


와, 나 그때 정말... 감동해서 울 뻔했다. 김여은의 30년 투쟁사가 드디어 이렇게 빛을 보는구나! 한 시대의 흐름을, 한 인간의 인생을 드디어 뒤엎는구나! 감격적이었다. 손녀는 서러웠지만, 적어도 증손녀는 그러지 않을 테니- 김 씨 가문에 이만한 경사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내심 여자 조카가 태어나 주길 기대했건만... 몇 달 뒤, 할매와 단 둘이 집에 있던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동상! 보름이 성별 나왔어. 남자래!"


지금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사랑스러운 조카지만 사실 그때는 조금, 아주 조금 실망스러웠다. 첫 조카는 여자이길 바랐는데... 나는 약간의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할매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그랬는데...!!!!!!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이고 아이고..."


응...? 뭐지, 저 과한 반응은...? 박수까지 치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할매. 그러더니 전화를 바꾸라며 오빠에게 친히 말씀하시길...


"내심 걱정했는데... 내가 이제 더 바랄 게 없다!

너희 할 일 다 했어!!!"


아... 그렇구나... 내심 걱정했구나... 오빠랑 언니는 이제 할 일을 다 한 거구나... 거짓말쟁이 할망구. 나는 배신감에 소리쳤다.


"딸도 좋다매!!!!!!!!!!! 아니, 그렇게 아들을 바랐어?

그럼 딸이었음 어쩔 뻔했어?"


그러자 우리의 임 '정자' 여사님! 수줍게 웃으시며 가라사대...


"그럼 하나 더 낳으면 되지~"



그날, 잔다르크를 표방하던 신 여성! 김여은의 투쟁사는 끝이 났다.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생각. XY 염색체를 향한 할매의 갈망은, 절대진리를 따르는 신앙과도 같은 것임을 너무 늦게 깨달은 거다. 에휴...


이제는 하다하다, 손녀보다 손녀사위를 더 좋아하는 정말 대단한 우리 할매! 이왕에 남자 밝히는 거, 그 남자들한테 사랑이라도 많이 받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부디 남은 여생에선 남자들이 그녀를 밝혀 주기를, 더없이 환하게 밝혀 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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