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17 ξ 연주씨의 일일
아무리 많은 직업을 거쳐도 다시 쓰는 사람으로.
그동안 가졌던 직업은 네이미스트, 출판사 연구개발원, 편집자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가진 업은 ‘엄마’. 해 보니 이건 모든 직업의 통칭이다. 오늘을 보낸 나의 새삼스런 소회다.
암호 해독자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난 둘째가 서툰 말로 무언가를 찾는데 쉽사리 알아채기가 어렵다. 몇 번이나 깨지고 나서야 해독에 성공한다. 그다음은 탐정이다. 방금 해독한 무언가를 찾아야만 한다. 이걸 찾지 못하면 등원이 미뤄지거나 갈등이 발생한다. 최대한 노력하고, 끝내 찾을 수 없다면 당장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변신한다.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을 보여준다. '무언가'를 잊게 하는 것이다.
첫째도 일어나면 이번에는 요리사다.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거창하진 않다. 식빵에 쨈을 바르고 치즈를 얹어 반으로 접는다. 아이들이 먹는 사이에 과일을 깎는다. 마실 것을 원하면 우유나 물을 준다.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간다. 째깍째깍 시계는 아침에만 짹짹하고 더 빠르게 간다. 음식을 치우려고 하면 꼭 그제야 더 먹는단다. 안타깝지만 먹는 시간은 끝났다.
“있을 때 먹어야지.” 하고 식판을 거둬간다.
앞치마를 벗음과 동시에 코디네이터가 된다. 6세 의뢰인과 회의를 거쳐 고른 옷을 입힌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내 옷을 입는 사이, 둘이 다투면 판사로 등장한다. 둘 다 억울하지 않게 솔로몬이 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사실 내가 가장 억울하다.
시간을 보니 걸어가기 어렵겠다. 이번엔 운전기사다. 아이들을 차에 태워 원 앞에 도착한다. 지난주, 퇴고를 하다 하다 지쳐서 보내 줄 때의 느낌으로 나지막이 말한다.
“이제 가라.”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얘기가 떠올라, 한 번 더 뒤돌아 보는 아이들에게 톤을 올려 외친다.
“좋은 하루 보내!”
돌아오는 길에는 심사위원이 된다. 오늘의 등원은 꽤 괜찮았다. 괴물이나 악당 같은 직업은 등장하지 않았으니 잘 참고 이겨냈다.
곧이어 혼자 들어온 집 안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난장판이네. 눈을 꼭 감는다. 10시.
어쩔 수 없는 직업 말고, 원하는 직업으로 환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청소부는 잠시 미뤄두고, 쓰는 사람으로 건너뛴다.
마무리해야 할 글이 있는데, 4시 하원 전에 교정까지 끝내야 한다.
세 시간쯤 쓰다 보니 배가 고프다. 시간이 없는데 배고픈 상황이 달갑지 않다. 배고픈데 식욕이 없을 때는 더 난감하다. 뭘 먹어야 되나. 최대한 버티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런 날은 배고픔과 포만감의 정도가 극단적이다. 때를 놓치기 때문이다.
알약이 나와야 된다고 중얼거리다가, 두 달 전에 가봤던 시장통 국숫집이 떠오른다. 대충 입고 서둘러 나선다. 먹다 남은 음료수를 냉장고에 넣으려다 그대로 둔다.
‘저게 식기 전에 돌아오겠어.’
밖에 나오니 가랑비가 사선으로 날리고 있다. 들고 나온 우산을 비뚜로 든다.
뜨거운 여름에 갔던 국숫집을 비 오는 가을에 다시 간다. 사거리 신호등을 건너 한 블록을 걷고, 또 나타난 사거리의 신호등을 건너 한 블록을 걸은 뒤 긴가민가하며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간다. 몇 채의 주택을 지나자 시장 입구가 보인다. 익숙한 시장 속에서 낯선 국숫집을 찾는다. 중심 거리를 따라 좀 더 내려가다가 동그란 식당 간판이 빽빽하게 들어선 왼쪽 사잇길로 빠진다.
‘이 끝에 있었던 것 같은데’
맞다! 헤매지 않고 단박에 찾아냈다. 자주 헤매고 돌아가는 내게 이례적인 성공이다.
들어서니 마침 한 자리가 비어있다. 가게는 노출된 주방과 6개의 테이블이 촘촘하게 붙은 식사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사람은 국수를 만들고, 다른 사람은 완성된 국수를 가져다주느라 바빴다.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60대쯤 돼 보였다. 아마도 그들의 자식뻘 되는 내가, 그 사이에 앉는다. 잔치국수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서너 명의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잠시 뒤, 국수와 함께 다른 테이블의 양념통이 넘어온다. 온전한 국물 맛을 보고 싶어서 몇 차례 숟가락질을 하는데 양념통이 옆 테이블로 넘어간다. 그제야 묻고 싶었다. “그거 넣으면 더 맛있어요?”라고.
하지만 늦은 걸 안다. 아침에 아이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으이그, 있을 때 먹어야지.”
의도치 않게 아이의 마음을 체험한다. 어른들의 시간이 좀 더 재촉당하는 것만 빼면 비슷한 상황이었다.
어차피 싱겁게 먹으니까 양념통에 대한 미련은 버린다. 몇 사람이 밖에서 기다리는 걸 보고 국수를 입 안으로 밀어 넣는다. 이렇게 급히 씹어 삼키는 건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점심시간에 좁은 맛집에 온 내 잘못이니 쉬지 않고 먹는다. 먹는 둥 마는 둥 음식을 삼키지 않던 아이들이 떠오른다. 지독한 유전의 굴레. 더 먹으려는 국수를 빼앗기는 상상을 한다. 오늘 아침, 요리사가 너무했다.
길게 자른 김치와 주먹밥, 국수가 놓인 식탁 위로 반성이 쌓인다. 그리고 뜻밖의 이야기들도 오간다.
“00 이가 죽었대.”
“벌써 몇 년 전에 죽었어.”
죽은 이의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사람을 타박하는 소릴 듣는다. 그러고는 우리 모두 장수의 상징인 국수를 후루룩 삼킨다. 많은 소리가 뒤섞여 웅성거리는데 새로운 사람이 식당에 들어왔다. 그러자 앞 테이블 어르신들이 ‘재민이 아빠’를 외친다. 순식간에 식당 안을 채운 재민이 아빠. 저들이 말하는 재민이는 몇 살일까.
작은 식탁이 들려오는 말과 생각들로 넘칠 지경이다.
무사히 국수를 비우고 남은 주먹밥 네 개. 조물조물 뭉쳐 놓은 주먹밥을 접시째 들고 주방으로 간다. 바빠 보여서 그냥 갈까 하다가, “위생봉지 하나 주시면 알아서 싸갈게요.” 하고 말한다.
봉지를 덜렁 들고 문을 나서니 여전히 비가 온다. 동그란 주먹밥이 든 봉지를 들고 집으로 간다. 아침에 먹다 남긴 식빵을 싸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저 앞의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뀐다. 뛰었더니 차곡차곡 쌓아 올린 배 속의 주먹밥과 국수가 뒤엉킨다. 좀 앉았다 가고 싶지만 모든 의자가 비에 젖었다. 비바람에 바스락대는 봉지를 들고 걸음을 재촉한다.
집에 도착하니 음료수가 잘 기다리고 있다. 꿀꺽꿀꺽 마셨더니 뒤엉킨 음식들이 가라앉는다. 오며 가며 음식을 먹는 시간까지 30분이 채 안 걸렸다.
집은 여전히 소리 없는 아우성 중이다. 오전에 미뤄뒀던 청소부로 돌아갈 시간이다. 쓰다 만 글을 저장하고 시스템 종료를 누른 뒤, 노트북을 닫는다. 하원 전에 쓰는 사람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오늘 밤을 기약하며 어쨌거나 약속한다.
“다시 올게.”
아무리 많은 직업들을 거쳐도 다시 쓰는 사람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