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의 공기는 매섭게 쌀쌀하다. 무형의 차가운 공기는 집안의 훈훈한 온기와 만나 형태를 만든다. 베란다 유리창에서는 이슬이 맺혀 떨어진다.
요가매트를 깔려있고 나는 그 위에 가부좌를 한 채, 눈을 감는다. 앞의 책상엔 아이패드가 켜져 있는데 여러 화면에서 나와 같이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명상의 시작을 알리는 싱잉볼의 맑은 소리에 맞춰 모두 호흡 속으로 첨벙 들어간다. 나도 내 호흡 속으로 깊이 잠수한다.
21년 2월 한국명상학회 동계 집중수련회. 내가 맨 처음 참여한 집중수련회의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zoom으로 각자의 공간에서 모여 명상을 하고 있지만, 서로의 정신과 마음은 온라인 한 공간에 모여있다. 지도하는 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정신이 공유되고 잡음에 흐트러진다.
호흡과 호흡을 안정적으로 관찰하려는 찰나..
그때 나를 계속 괴롭히던 문제가 발생한다.
10분 이상 앉아있으면 내 다리가 저려온다. 허리도 뻐근하고 아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움직여야 하나? 다른 사람들은 통증 없이 잘 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명상을 처음 했었을 때 참 힘들었던 것이 한 자세로 일정 시간 앉아 있게 되면 다리가 저리고 아픈 것이었다.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것이 익숙지 않기에 다리가 먼저 저려온다. 다리를 움직여야 하나? 움직이면 왠지 제대로 명상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명상을 한다고 하기보다 고통 참기 대회를 하다가 명상을 마무리한다.
명상을 할 때 나타나는 다양한 통증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명상을 하다가 허리나 다리가 아파오면 절대로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움직여도 된다. 다만 움직이는 과정까지 세밀하게 살펴보며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까지도 마음 챙김 명상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측다리가 눌려서 저린 통증이 생긴다고 생각해 보자. 대개 평상시 마음이라면 다리가 눌렸네. 아프다. 저리다. 그냥 휙 다리를 움직여버린다. 하지만 이는 자극에 대해서 반응한 것에 불과하다.
명상 과정 중에서 저림이 온다면 첫 번째, 통증을 관찰한다. 통증이 정확히 어디 어떤 부분에서 오는지 느껴본다.
'발이 저린다'가 아니라 발 바깥쪽인지, 안쪽인지 그리고 그 세기는 어떻게 차이 나는지 그 영역이 변화하는지 고정되었는지 정확한 영역을 파악한다.
통증의 양상이 어떠한지 관찰해 본다. 저림의 강도는 동일한지, 가장 세게 느껴지는 부분을 관찰한다. 그러면 어떤 부분은 눌려서 아픈 부분, 저려서 아픈 부분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고통을 대하는 내 마음이 어떤지 알아차린다. 단지 이 고통을 없애는 것에만 사로잡혀있는 건 아닌지, 다리를 움직 이려고 의도를 낼 때 마음은 어떤지 관찰한다.
약간씩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본다. 위에서 언급한 통증의 부위, 세기, 양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1cm 움직임도 통증과 감각의 변화는 다양하게 펼쳐진다.
그에 따라서 그것을 빠르게 없애버리고만 싶었던 내 마음의 변화 과정 또한 알아차린다.
통증을 관찰함으로써 내 느낌과 감각을 더 세밀하게 알아차릴 수 있고, 내가 불쾌한 감각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렇게 관찰을 세밀하게 해 나가다 보면 내 몸의 불쾌한 감각들을 대할 때 좀 더 여유롭게 대할 수 있게 된다. 이제는 통증이 두렵지 않다.
통증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통증 그 자체라기보다 그에 반응하는 감정적 상태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는 통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인생에서 벌어진다. 나에게 불편한 감정들이 거품이 쌓이듯 부풀어 오른다.
그 문제에 대한 본질 보다 그것에 파생된 두려움, 불안, 짜증이 뒤섞여 그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거품들은 고체화되어 버려 딱딱하게 굳어지고 퇴적화 되듯 겹겹이 쌓인다.
굳은 결심을 하고 힘든 과정을 겪고 명상 지도자가 되었다. 의욕은 넘쳐났지만 어디서 바로 적용해야 할지가 의문이었다.
나는 진료를 하고 있었으므로 따로 명상 센터를 차린다던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명상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해서 하루빨리 사람들을 지도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현실적 상황이 따라주지 않았다.
마음은 앞서고 몸은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더욱 답답하고 불안해지는 법이다.
문득 명상을 하면서 역설적인 나의 모습을 알아차렸다.
"명상 지도를 하려고 이렇게 답답해하는 모습이 명상 지도자의 태도에 걸맞은 태도인가?"
"나는 이제 갓 명상지도자를 획득하였고, 그것을 세상이 잘 알아봐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서두르는가?"
다시 나의 마음을 관찰했다.
너무 의욕이 너무 앞서있었다.
내가 지도자가 되었으니 마음대로 잘 될 수 있겠다는 만용을 부렸다.
사람들을 빨리 지도하고 싶다! 라는 마음
통증이 없는 몸이란 존재하지 않듯이 내 뜻대로만 되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허구다.
나의 불편한 감정들을 알아 봐준다. 착 달라붙어있어 엉켜있었던 감정들이 실은 순간의 감정이고, 거품이었음을 알아차린다.
하나의 거품에 잘하고 싶었던 마음
하나의 거품에 나의 집착을 알아차리고 떼어내준다.
내가 원하는 대로만 인생이 이뤄지지 않는다.
통증이 불쾌한 감정이지만 우리 몸에 경고를 주려고 하는 것이듯, 불편하고 원치 않는 일들도 우리 생에 경종을 울리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명상 지도자를 따고 너무 서두르려 했던 것처럼.
그러나 몸에 힘을 뺄 때 문제는 쉽게 해결이 되는 법이다.
아주 쉽게 내가 원하는 곳에서 명상을 지도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