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명상 백 쉰 두 스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표상이라는 말의 정의를 살펴보자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에서 재생된 것.
이 세계는 나의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에서 재생된 것이라는 것이다.
말이 거창한데 비유를 들어보면 쉽다.
아마 예전에 국어시간에서 들어봤을 법한 시를 한 번 보자.
翩翩黃鳥 (편편황조)
雌雄相依 (자웅상의)
念我之獨 (염아지독)
誰其與歸 (수기여귀)
펄펄 나는 저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정다운데
외로울 사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기원전 17년 전 고구려 유리명왕이 지은 시로 아내를 그리워 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다.
꾀꼬리가 사실 진짜로 정다운지 알 수 없다. 실제로 구애를 하다가 거절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리명왕 본인이 아내를 만나지 못해 외로우니 꾀꼬리가 우는 모습이 정답게 보이는 것이다.
꾀꼬리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꾀꼬리는 맹금류에게는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으로,
외로운 사람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낮잠을 자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시끄러운 방해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객관적인 꾀꼬리는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감각기관, 관점을 거쳐 여러 가지 종류로 표상화된다.
결국 내가 보는 세상과 당신의 보는 세상은 완벽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동일한 대상을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같은 대상을 보고 있지만 이때까지 내가 겪은 과거의 사건들이 나의 관점을 만들고 그에 따라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본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선 상대방의 시선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남과 동일한 시선으로 볼 수 없으며, 남들도 나와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없다. 경험과 시야가 100% 동일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사이에는 이런 것을 전제하고 만난다. 그 사람이 익숙하지 않으니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이 나와 다름을 인지한다. 공통점을 발견하며 시간이 흘러간다. 사이가 좋아지고 친해지면 나와 비슷한 세상을 볼 것이라고 짐작한다. 실제로도 뇌과학적으로 관계가 깊어진 친구, 가족을 생각할 때 활성화 되는 영역이 '나'를 생각하는 영역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고 한다.
여기서 갈등과 대립이 일어난다. 실제로 우리가 보는 세상은 완전하게 다르지만, 나와 친한 사람은 나와 같아야만 한다고 여기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신혼인데, 아내와 내가 처음 같이 살면서 싸웠던 문제들을 곰곰이 돌이켜보자면,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오해했던 것이 컸다. 아내가 별 뜻 없이 한 이야기를 나의 관점으로 과장하고 오해하고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데 아내는 진짜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그 과정에서 또 속이 상한다. 작은 오해가 다툼이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러 번의 다툼을 거치고 대화를 하며 이렇게 정리하게 되었다.
서로 기분이 나쁘거나 상처가 되는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되물을 것.
"그때 말한 것이 무슨 의도였냐,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맞는 것이냐"
라고 물으니 서로의 세계관이 이해되고 오해가 풀렸다.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할수록, 그 사람과 친숙해질수록, 이 말을 되새겨본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그 사람과 내가 보는 세상이 완전히 같아질 수 없다.
명상에서도 이 같은 태도가 기본적으로 장착이 되어 있다.
마음 챙김 명상의 7가지 태도 중의 1번은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쉽게 판단한다. 분별심이 크면 클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많아지고 나도 괴롭고 상대방도 괴롭다.
명상을 하며 나의 관점으로 보는 세상만이 있는 게 아님을, 세상을 보는 나의 안경과 더불어 상대방의 안경도 있음을 인지해본다.
갈등과 대립이 심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아주 자그마한 호기심과 진심 어린 질문, 손톱만큼의 양보 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