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명상 백 쉰네 스푼
최근 들어 주변사람들로부터 명상에 관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명상에 관해 궁금해한다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 수 있기에 도움이 돼서 기쁘다. 한편으로는 명상을 찾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불안, 두려움이 있다는 것일테다. 만약 여러분이 복권이 당첨되어 365일 세계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생각해 보자. 명상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1도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받았던 질문 중에 흥미로웠던 것이 있어 공유해보고자 한다.
"최근에 명상 관련 책을 읽으며 흥미롭게 공부를 했다. 명상을 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다가 내 삶은 크게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내가 답변을 한 것은 간단했다.
"실제로 하루에 명상 얼마씩 하세요?"
물어보면 드문드문 몇 번 하다가 안 했다고 한다.
"간단합니다. 명상 더 많이 하시면 고민이 해결됩니다."
명상은 책을 보고 배우는 것보다, 실제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명상은 머릿속의 활동이기에, 책을 읽고 명상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 것과, 명상을 직접 하는 것을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완벽하게 다르다.
축구를 배운다고 상상해 보자. 축구를 처음 배울 때 교실에서 이론을 배울 것이다. 어떻게 공을 두고 몇 발자국을 뛰어와서 발의 어떤 측면에서 차야 한다고 교육받는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차보는 것이다. 수 십 번 수 백번씩 차 보면서 부딪혀봐야 직접 나의 지식이 되는 것이다. 축구를 비유로 들면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명상은 머릿속으로 이뤄지는 과정이기에 명상 관련 책을 읽고, 글을 보면서 명상하면 좋다는 것을 명상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책을 읽고 뿌듯해하며 새로운 지식을 안 것으로 만족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명상을 하루에 꾸준히 하지 않으면 뇌는 변화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 것은 지식을 쌓는 것이다. 하지만 명상은 생각과 지식을 쌓는 과정이 아니라, 내 머리가 복잡하게 방황을 하는 것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겪는 것이다. 이것이 어려운 수행이다. 생각은 내 의지대로 조절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설이 발생한다. 나는 명상에 관해서 '알고'있는데, 삶의 괴로움은 줄어들지가 않으니, 오히려 자신에게 더 짜증이 나거나 불편해진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는 것은 간단하기에 명상하는 시간을 실제적으로 많이 늘리라고 답변을 해주었다.
명상은 공부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극단적인 비유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명상에 대해서 모든 논문을 달달 외우고 있어 모든 효과를 알고 있지만 명상은 하나도 하지 않는 사람과
명상의 효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명상을 통해 삶의 괴로움을 극복한 사람
누가 더 행복하고 괴로움이 없이 살겠나? 간단하다 후자다.
명상은 생각의 영역이 아니다. 느낌과 존재의 영역이고, 유전적 본능을 거스르는 영역이다.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 대면하면서 얻는 수밖에 없다.
결국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알고만 있고 행하지 않으면 반쪽짜리 지식이 된다.
오히려 지(知)만 있는 상태에선 괴로움을 더 가중시킬 수가 있다.
결국에 생각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려면 행(行)으로 밖으로 드러나야 한다.
내 마음속도 그렇다.
명상을 하면 좋다 생각 보다. 그저 앉아 내 호흡을 관찰하며 생각이 이리저리 방황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하다.
P.S 사진은 지행합일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왕양명이다.
그는 양명학의 창시자로 이론과 실천이 중요함을 설파했다. 당시 과거시험과 사변적인 것에만 몰두되어 있던 주자학을 비판하며 양명학(陽明學)을 창시했다.
이 사람의 생애를 좀 더 살펴보면 왜 이런 주장이 나온 지 알 수 있다.
그는 철학자 이면서도 군사전략관이었다.
가장 큰 군사적 성공은 1519년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의 반란을 평정한 것이었다. 정덕제가 친정을 결정할 정도로 큰 반란이었는데 당시 병주부사였던 왕수인은 뛰어난 책략으로 정덕제가 도착하기 전에 10,000명의 병사로 100,000명의 영왕군을 괴멸시키고 주신호를 사로잡았다.
- 출처 나무위키. 왕양명
실제 사람이 죽는 전장을 수없이 누비었기에 삶과 동떨어진 정치, 철학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의 양명학은 후대에 널리 영향을 끼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