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다(した), 빵보다 먼저 익어야 했던 나.
토요일이었다.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어제 ‘동물의 왕국’에 나온 코끼리 귀처럼 하늘하늘 날렸다. 동사무소 앞 편의점, 점장 지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제 나를 위한 1+1, 2+1은 그만 발주하라고. 그리고… 네 미모에 내가 좀 많이 썼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벽에 바짝 붙은 백 원짜리가 미끄러지며 덜그럭 소리를 냈다. 검붉은 미등 아래, 이백 원어치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겨우내 나를 위로하던 율무가, 정확히는 율무 0.534%가 들어간 차가 뽑히는 중이었다. 나는 그걸 편의점을 향해, 후— 지선을 밀치듯 마셨다.
명예롭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퇴소였다. 서너 군데 서명하고 계장에게 고개 숙이고 동장에게 인사하고 담당 주임에겐 약간의 충성도 곁들여 마무리했다. 그게 다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제 막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이제 뭘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그래서였다. 나는 퇴근 후 제과제빵학원을 다녔다. 이유는 단순했다. 빵을 좋아했다. 커피를 좋아했으니, 커피랑 어울리는 빵도 좋아했고, 하필 그 빵을 참 좋아했다.
학원은 규모가 컸다.
반장이 되었고 인터뷰를 했으며 얼굴이 대한제과협회 신문 일지면에 실렸다. 엄마는 벼룩시장보다 판매 부수가 적은 신문을 고이 접어 보관하셨다. 유명세를 탔고 부원장님 곁에 붙어 수발을 들었다. 그 덕에 소집해제 이후 3개월 동안 학원 강사로 무료 근무를 해야 했다. 그래서 편의점에서도 일했다. 시급 2,850원. 거기서 가장 많이 팔린 건 담배와 콘돔이었다. 주로 여자가 사갔다.
“아저씨, 이거 어때요?”
“네?”
“써보셨어요?”
수치심보다 난감함이 먼저 들었다. 담배 이름도 몰라 실랑이가 벌어지곤 했다. 둘 다 써보지도 펴보지도 못한 나는 그 시절 문명에 밀려나는 느낌을 받았다. ‘아, 역시 2년 넘게 사회에서 격리된 나라는 인간…’ 쓸쓸한 위기감이 몰려왔다. 그래서 바로 서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제목.
딱 내 처지를 말해주는 듯했다.
세상에 뒤처지지 않게 해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나는 그렇게 처세술로 가득 찬 책들을 읽어댔다. 문득, 박형미 부회장 아주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났다. 예전에 어디선가 봤던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은 진짜 죽을 것 같을 때 살고 싶어진다.’ “아이고 아파죽겠네”라는 말은, 사실 아직 살만하다는 뜻이었다.
그땐 몰랐다.
내가 들어간 빵집, 목동 아파트 단지 안에 있던 에센브롯 제과점. 거기선 진짜 죽을 것 같았다. 그것도 단순히, 너무 힘들어서. 청춘의 첫 시련이었다. 첫 어둠, 첫 차, 첫 전철, 그리고 첫 출근을, 첫눈과 함께 하게 될 줄이야.
출근은 새벽 6시.
컴컴한 가게 앞에 나 혼자 서 있었다.
누군가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사장님이었다.
“마, 안 들어가고 뭐하노!”
굿모닝도, 안녕도 없었다. 그의 첫 인사는 ‘마’였다. 그게 전부였다. 나에겐 열쇠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서 있었다. 나는 변명을 했다.
“아… 열쇠가 없어서요.”
사장은 다시 ‘마’로 답했다.
"마, 전화를 했어야지! 뭐한다고 삐리하게 서 있노?”
그는 내게 핸드폰 번호를 알려준 적 없었다. 내가 아는 건 가게 전화번호가 전부였다. 그래서였을까. ‘02’로 시작되는 숫자조차 빵을 먹으려 달려드는 이처럼 보여서 놀랐다. 나는 제과제빵학원의 에이스였다. 자격증도 두 개나 있었다. 스스로 대견했었다. 하지만 현장은 달랐다.
“자격증 있나? 그라믄 함 만들어봐라.”
현장에서는 조소와 비아냥 듣기 좋은, 그냥 수첩이었다. 딱히 유용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았다. 나는 초보가 아니었고, 그냥 시다(した)였다. – 일본식 속어로 ‘아래’, ‘밑’이라는 의미 –
15평 남짓한 빵집에서 하루에 100가지를 만들었다. 오전엔 제빵, 오후엔 제과. 일해보니, 학원 소꿉놀이는 하루 만에 날아갔다. 밤 10시에 퇴근했고, 한 달 일한 월급은 50만 원. 버스와 지하철은 각각 800원이었고, 교통비는 4~5만 원. 버틸 만했다.
그땐 그게 다였으니까.
그리고… 나도 그게 다인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