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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Aug 16. 2024

P09. 날아라, 날아라 깃든 슬픔아

  - 허수경,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P09. 날아라, 날아라 깃든 슬픔아 - 허수경,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작과비평사, 창비시선203)    

 

   시인은 먼저

   대놓고 묻습니다.

   ‘왜 삶보다 사랑은 더 어려운가’라고요.

   아마도 그것은

   ‘울어도 되는 일이 없는 세월’을

   시인이

   살아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어쩌면 시인은

   삶보다 사랑이

   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삶보다,

   아니,

   사랑이 삶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그렇게

   역설의 느낌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요.

   그래서

   저한테는

   시인의 그 말이

   삶보다 사랑이

   더

   어려운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왜

   사랑이 삶보다

   어렵겠는가,

   하고

   따져 묻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살아본 사람은

   누구나

   알지 않을까요.

   삶도 어렵고,

   사랑도

   그 삶만큼

   어렵다는 것을요.

   둘을 놓고

   감히

   서로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는 것을요.

   이걸 시인이

   왜

   모르겠습니까.

   삶도 어렵고,

   사랑도 어려우니,

   시인은 우리처럼

   슬플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시인의 이런

   절규를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날아라, 날아라 깃든 슬픔아’라는

   절규를요.

   삶도 사랑도

   그처럼

   슬프도록 어렵다는 것을

   잘 아는 시인이니,

   이런

   통찰의 한마디를

   할 수 있는 거겠지요.

   ‘스민 슬픔은 아물지 않고 어디론가 가고’라는

   통찰의 한마디를요.

   그렇습니다.

   모르는 새

   시나브로

   우리에게

   속 깊이

   깃들고 스며든

   슬픔은

   아물 턱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어디론가

   가버릴 뿐이겠지요.

   아물지 않고

   그저 가버리니,

   상처는,

   흉터는,

   아픔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죽하면 시인은

   ‘가지 마라 가지 마라’라고

   토로하겠습니까.

   상처만,

   흉터만,

   아픈 기억만

   남겨둘 바에야

   가지 말고

   차라리

   그대로 있어 달라고 하는

   시인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저밉니다.

   여북하면,

   오죽하면

   그러겠습니까.

   시인은 더 나아가

   결국 이렇게

   고백하고 맙니다.

   ‘나는 추억을 수치처럼 버리네’라고요.

   우리는 잘 압니다.

   삶이

   아무리 어려워도,

   사랑이

   아무리 어려워도,

   추억이 있다면

   그 추억의 힘으로

   그 어려운 삶도

   사랑도

   기어이

   견딜 수 있다는 것을요.

   한데도 시인은

   그 추억마저

   수치처럼 여겨서

   버린다고

   가차 없이 말합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시인이기를

   그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렴,

   시인은

   노래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우리에게

   속삭이듯

   고마운 한마디를

   잊지 않고 해줍니다.

   ‘나는 다시 노래를 할 수 있어요’라는

   한마디를요.

   예,

   그거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시인이 계속

   필요한 것이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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