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수경,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P09. 날아라, 날아라 깃든 슬픔아 - 허수경,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작과비평사, 창비시선203)
시인은 먼저
대놓고 묻습니다.
‘왜 삶보다 사랑은 더 어려운가’라고요.
아마도 그것은
‘울어도 되는 일이 없는 세월’을
시인이
살아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어쩌면 시인은
삶보다 사랑이
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삶보다,
아니,
사랑이 삶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그렇게
역설의 느낌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요.
그래서
저한테는
시인의 그 말이
삶보다 사랑이
더
어려운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왜
사랑이 삶보다
어렵겠는가,
하고
따져 묻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살아본 사람은
누구나
알지 않을까요.
삶도 어렵고,
사랑도
그 삶만큼
어렵다는 것을요.
둘을 놓고
감히
서로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는 것을요.
이걸 시인이
왜
모르겠습니까.
삶도 어렵고,
사랑도 어려우니,
시인은 우리처럼
슬플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시인의 이런
절규를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날아라, 날아라 깃든 슬픔아’라는
절규를요.
삶도 사랑도
그처럼
슬프도록 어렵다는 것을
잘 아는 시인이니,
이런
통찰의 한마디를
할 수 있는 거겠지요.
‘스민 슬픔은 아물지 않고 어디론가 가고’라는
통찰의 한마디를요.
그렇습니다.
모르는 새
시나브로
우리에게
속 깊이
깃들고 스며든
슬픔은
아물 턱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어디론가
가버릴 뿐이겠지요.
아물지 않고
그저 가버리니,
상처는,
흉터는,
아픔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죽하면 시인은
‘가지 마라 가지 마라’라고
토로하겠습니까.
상처만,
흉터만,
아픈 기억만
남겨둘 바에야
가지 말고
차라리
그대로 있어 달라고 하는
시인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저밉니다.
여북하면,
오죽하면
그러겠습니까.
시인은 더 나아가
결국 이렇게
고백하고 맙니다.
‘나는 추억을 수치처럼 버리네’라고요.
우리는 잘 압니다.
삶이
아무리 어려워도,
사랑이
아무리 어려워도,
추억이 있다면
그 추억의 힘으로
그 어려운 삶도
사랑도
기어이
견딜 수 있다는 것을요.
한데도 시인은
그 추억마저
수치처럼 여겨서
버린다고
가차 없이 말합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시인이기를
그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렴,
시인은
노래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우리에게
속삭이듯
고마운 한마디를
잊지 않고 해줍니다.
‘나는 다시 노래를 할 수 있어요’라는
한마디를요.
예,
그거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시인이 계속
필요한 것이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