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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Sep 13. 2024

My Cinema Aphorism_17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17

CA81. 고레다 히로카즈, 〈브로커〉(2022)

   송강호는 마지막 순간 정말 그것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일까. 〈의형제〉(2010, 장훈) 이후 강동원이 송강호 옆에서, 또는 송강호와 함께일 때 얼마나 빛날 수 있는지를 감독은 진작에 알아차렸던 것일까, 나처럼? 도입부에서 이지은이 아이를 낳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시작했더라면 이 영화는 어쩌면 이지은 단독 주연의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송강호가 이 영화에서 신비로운 주연임은, 대개의 영화에서는 주연배우가 이야기를 끌고 가게 마련인데, 이 영화에서 송강호는 이야기 전체를, 아니, 등장인물들 전체를 받쳐주는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끌고 감’과 ‘받쳐줌’의 차이. 이런 성격의 주연 캐릭터는 처음 본다. 송강호이기에 소화해 낼 수 있는, 또는 표현해 낼 수 있는 인물.


CA82. 데이비드 린, 〈닥터 지바고〉(1965)

   나한테 〈닥터 지바고〉는 시인을, 시인의 감수성을, 시인이 시의 영감을 받는 순간을, 시인이 시를 쓰는 순간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시인의 마음을 가장 아름답고 눈물겹게 그린 영화로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지바고의 여인이 그의 시를 알아보는 눈의 소유자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이 밖의 다른 것은 애써 굳이 따져보고 싶지 않다. 더불어, 내가 영화 속에서 맞닥뜨린 가장 안타까운 심장마비의 순간―. 그리고 발랄라이카.


CA83.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세 가지 색 : 블루〉(1993)

   30년 만에 확인하는 여전한 새로움, 또는 ‘여전함’의 새로움. 그 새로움의 놀라움. 당시는 ‘블루(Blue)’의 시대였다. 〈터미테이터2 : 심판의 날〉(1991, 제임스 카메론)의 블루, 〈그랑 블루〉(1988, 뤽 베송) 블루, 〈베티 블루 37.2〉(1988, 장 자크 베넥스)의 블루……. 이 일련의 흐름에서 그 정점은 단연 〈세 가지 색 : 블루〉였다. 그 정점이라는 평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30년 만에 재확인하는 놀라움, 이 놀라움의 새로움, 이 새로움의 여전함.


CA84. 아니쉬 차간티, 〈런〉(2020)

   그녀가 ‘런’을 하려는 이유가 ‘어머니’라는 설정의 그로테스크함. 그 그로테스크함을 얼굴로 표현하는, 아니, 얼굴 자체가 표현인 사라 폴슨의 재능 또는 역량. 〈글래스〉(2019, M. 나이트 샤말란)의 사라 폴슨의 연기를 좀 더 사적인 차원에서 확장한 버전. 양육과 사육의 미세한 차이, 그 경계의 위태로움. 또는 〈미저리〉(1990, 로브 라이너)가 보여준 간호와 사육의 압도적인 차이에 대한 뒤집힌 오마주. 양육의 정성, 간호의 필요성, 그리고 사육의 강박성 욕망.


CA85. 김성훈, 〈비공식작전〉(2023)

   국가가 위험에 처한 자기 국민을 구하는 일에 어째서 개인의 의지가 필요한 걸까. 그것이 ‘공식’ 작전이 아니라, ‘비공식’ 작전이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영화를 포함하여, 하정우 옆의 주지훈(〈신과 함께〉), 김윤석 옆의 주지훈(〈암수살인〉), 정우성 또는 황정민 옆의 주지훈(〈아수라〉)이 모두 어쩐지 활용되는 느낌보다는 소비되는 느낌인 것은, 또는 그런 느낌이 자꾸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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