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끝별, 《와락》
P28. 우리가 뒤꿈치를 쳐들고 나서려면 – 정끝별, 《와락》(창비, 창비시선 295)
여러분은
시인의 말하는
‘벼락치듯 덮치는 잠’을
자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너나없이
여러 가지
알 수 있는 이유로,
또,
그보다 더 많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가
어김없이,
틀림없이
고통스럽고
피곤한
불면의 시대임은
부정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려면
‘벼락치듯 덮치는 잠’을
가끔이라도
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벼락치듯 덮치는 잠이 삶을 살게 하나니’라고요.
그런 잠을 자고 나서
이튿날 아침
눈을 뜨면 우리는
어쩌면
시인처럼 이렇게
가만히
중얼거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부드러워라 두 입술이 불고 있는 아침이 기적’이라고요.
그럼
우리도
시인처럼
‘단 하루 단 한사람 단 한번의 인생을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또,
그럼
우리도
시인처럼
‘높아지되 떨어지지 않고 미끄러지되 멈추지 않으며’
허위단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까지 오면
비로소
‘아직까지 누구도 아니었던 나는’
역시
시인처럼
‘황금빛의 시인의 시간을’
‘눈을 감고 기다’릴 수
있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예,
이것이 바로
‘잘 익은 시에서 풀썩이는 숨소리가 들리는 이유’일
것입니다.
숨소리가 들린다는 건
예,
살아 있다는 뜻일
터이니까요.
그렇게 살아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시인처럼
이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뒤꿈치를 높이 쳐들고 나서야 해요’라고요.
결국 이거네요.
‘벼락치듯 덮치는 잠’을
달게 자고 나면
‘뒤꿈치를 높이 쳐들고’
나설 수 있다는 거요.
참
간단하고
단순하고
명쾌한
답이네요.
이렇게 ‘와락’
덮쳐오는 깨달음이
참 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시인은 정확히
아는 겁니다.
이렇게 나서라고
우릴
똥겨주고
또,
우리에게
권해주는 시인의
마음이
참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