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동짓날답게 어둠이 밀려오듯

by 안녕 테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하루가 있다. 그러면 나는 스트레스로 인해 잠이 한없이 쏟아진다. 웅크리고 잠이 든다. 동짓날 그러니까 금요일에 그럴 뻔했다. 목요일 퇴근할 즈음 실험실 단톡방에 알람이 울렸다. 교수가 함께 있는 단톡방이다. 박사는 독감으로 병가 중이다. 우리가 실험하는 건물이 오래되고 포화상태라 건물 옆 주차장에 새 건물을 짓는다는 계획이 있다. 알기로 2026년이 완공이다. 도면을 주며 콘센트 위치를 정해서 달라는 얘기다. 기한은 내일(금요일) 까지란다. 출근해서 실험실 장비와 대충 필요한 콘센트를 짜야겠다고 생각하고 알았다고 말했다. 그날 밤, 교수님이 없는 단톡방에 글이 올라왔다. 대충의 콘센트 위치를 적은 도면그림이다. 교수가 다급하게 요청하신 것 같아 박사도 그에 맞춰 밤에 올리는 모양이다. 이것저것 의문이 생기지만, 우선 최대한 많은 콘센트를 설치해 놓으면 별 문제없을 듯 보였다.


출근하고 실험실에 필수 장비들을 대충 사진 찍어봤다. 도면에 놓인 실험대보다 필요한 추가되어야 할 공간과 실험대가 많았지만, 공동실험실 구역이 어떻게 꾸려질지 몰라 우려스럽기도 하다. 가자 중요한 실험대와 연구원실에 콘센트를 무조건 많이 놓아보겠다고 마음먹고 콘센트를 다다닥 다다닥 그려 넣었다. PPT 작업이라 인터넷에서 콘센트 이미지를 가져와 옮겼다. 바닥에 가까운 높이, 책상 위, 실험대에 필요한 220V 외에 110V, 고전력 장비까지 콘센트 모양에서 이것저것 추가될 사항이 있다. 콘센트 이미지에 테두리 색깔로 구별하기 시작했다. 정말 빽빽이. 특히 실험대 위 선반에 110v, 220v, 실험대 아래 높이 70m 220v를 표시해 놓으니 이미지 3개가 들어가는 블록 모양이 된다. 박사는 교수가 있는 단톡방에 올리기 전에 먼저 보여달라고 했다. 워낙 꼼꼼한 성격이라 이 정도면 됐겠지 하고 올렸다. 그런데 콘센트 모양에 테두리 색깔까지 복잡해 보였는지 콘센트 모양을 없애라고 했다(내가 이해한 바는 그랬다). 아무래도 너무 빽빽하게 보였나 보다 해서 이미지를 모두 지우고 말로 설명했다.


다시 이미지를 올렸다. 그게 아니란다. 2D상의 도면에서 설명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면 서로 이해가 잘 되지 않으니 높이, 전압차이, 고전압장비 색깔별로 구별을 해달란다. 그럼 콘센트 모양 빼고 색깔별로 표시를 해 달라는 것인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나? 최대한 빨리 해보겠다고 했다.(음.. 퇴근하면 크리스마스 연휴니까, 30분이라도 일찍 퇴근하고 싶으니까) 아마 박사는 이게 왜 어렵지 했을 것이다. 처음 도면에서 테두리 색깔만 칠하면 되는데. 전화가 왔다. 선생님 그게 아니라, 처음에 준 도면에 보면 콘센트가 세 개 있는데 어느 것이 70m고, 110v, 220v 인지 구별하기 위한 표시를 해 달라는 말이었어요. 콘센트 세 개에 표시가 하나도 없는데요. 네? 표시가 없다고요? 아! 선생님, 혹시 테두리가 안 보이나요? 저 각각 모두 표시했는데요. 네?!! 아, 죄송해요. 안 보였어요.

왼쪽 : 박사가 본 이미지 오른쪽 : 내가 본 이미지

몰랐다. ppt 파일로 저장해 카카오톡으로 올렸는데 아이폰에서 이미지에 색이 빠져 보일 줄은. 같은 일을 두 번, 아니 세 번 할 뻔했다. 전화할 생각을 왜 못했는지.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원본 파일을 따로 보관해 놨다. 두 번째 파일인 이미지가 사라진 파일에서 다시 다 붙여넣기를 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늦지 않게 제출했다. 무언가 휘리릭 지나간 기분이 들어 멍하고 허탈했다.


수요일에 예약한 팥죽을 찾으러 반찬가게에 갔다. 청소년이 다니는 학원 인근에 있는 반찬 가게로 집에서 꽤 거리가 멀다. 청소년 학원 시간에 맞춰 찾으러 간다고 8시 넘어 도착했다. 맛있어 보이는 반찬 2개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 팥죽도 같이 구입하려고요.

- 팥죽 다 나갔는데요. 재료도 없어요.

- 네? 저 팥죽 찾으러 온 건데요?

사장님 눈이 동그레 진다. 무슨 말하는 거야 하는 표정이다. 계산대 아래에서 예약 리스트를 꺼낸다.

- 금요일 찾으러 오는 것으로 주문했어요.

이름을 얘기하려는 순간, 내 이름 위로 색연필로 박박 줄이 그어져 있다. 누군가 찾아간 모양이다.

- 여기 제 이름 있네요.

- 찾아가셨는데요.

- 네? 제가 찾아갔는데 또 왜 올까요?

아차 하셨는가 보다.

- 아니, 그럼 누가 찾아갔지?

리스트를 보시더니 내 이름과 한 글자 다른 분을 가리키며 이 분이 찾아가셨나 하신다.

- 그분도 찾아가셨네요. 전화번호 뒷자리 확인 안 하셨어요?

전화번호 뒷자리까지 친절히 적혀 있는데 이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 아까 6시 반쯤 찾아가지 않은 손님들에게 모두 전화 돌렸어요.

- 저 전화받지 않았어요. 그럼 제 이름으로 찾아간 사람은 6시 전에 찾아가셨나 보네요.

- 이럴 어쩌나, 죄송해요. 팥죽 못 드셔서 어째요.


화가 난다. 이미 화가 나 있었다. 그러게요, 팥죽을 못 먹네요. 이럴 거면 제가 죽집 두고 왜 여기 왔을까요. 동네도 아니고 집에서 20분이나 걸리는 곳에 목요일에 찾아가느냐 금요일 찾아가느냐 고민하면서 요일을 수정까지 했는데요.


선심 쓰듯 계산대에 올려놓은 반찬 2개를 할인해 주신단다. 나는 괜히 이걸 들고 와서는 바로 나가지도 못하고 애매해하고 있는데 말이다.

- 죄송해요, 다음에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다음이라고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당연히 안되죠.

- 저 **동에서 왔어요.

- 아.. 죄송해요.

사장님이 내가 사는 동네를 아시기나 할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 괜찮아요, 다음에 올 일 없을 테니까요.

당황하는 사장님.


내가 이 가게 단골이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없었을 테다. 다음에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에 우리 사이 신뢰가 쌓이지 않았다. 수요일이 첫 번째 방문이었고, 회원 가입을 하면서 동짓날 팥죽을 말씀하시길래 고민하며 주문했다. 하필 처음 오는 손님에게 이런 실수를 하실 줄이야. 조금 더 왕래를 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테고, 이 가게를 계속 방문하기에 신뢰를 잃었다. 반찬이 맛있었어도 다음은 없을 듯하다.


부랴부랴 차에 올라 동네로 들어와 요가 수련을 했다. 요가도 집중이 안된다. 10분이나 늦었는데 말이다. 처음 하는 동작에 선생님의 동작 설명에 집중도 안된다. 더 부화가 난다. 새 동작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중간에 쉬었다.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러면 안 돼, 이러면 안 돼하고 되뇐다. 나의 감정을 타인에게 내보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생각한다. 날숨 들숨 몇 번을 쉬어본다. 집중한다. 무사히 요가를 마치고 나왔다. 요가 수련이 아니었다면 진이 빠진 채로 잠들었지 싶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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