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강의 속삭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룩소르(테베)에 도착한 첫날, 나는 나일강을 마주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고, 조금 차가운 바람이 내 옷자락을 부드럽게 스쳤다. 해는 높이 떠 있었지만, 아직 오후의 열기가 퍼지기 전이었다.
이집트에 오기 전, 룩소르라는 이름은 내게 단순한 역사적인 장소였다. 파라오의 무덤이 있고, 신전이 서 있는 곳. 하지만 막상 발을 디디고 보니, 이곳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심장처럼,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강가를 따라 걸었다. 룩소르는 나일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진 도시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동쪽은 삶이 시작되는 땅이었고, 서쪽은 삶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땅이었다. 하지만 지도와 여행 책에서 보던 것과 실제로 그곳을 밟으며 느끼는 것은 전혀 달랐다. 나는 먼저 살아 있는 자들이 사는 동쪽에서부터 이 도시를 바라보기로 했다.
이른 아침, 카르낙 신전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어둠이 물러간 하늘은 서서히 옅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무너진 신전의 돌벽과 기둥들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며, 오래된 돌들이 부드러운 빛을 머금었다. 그리고 나일강에서 올라오는 안개가 천천히 걷히면서 강둑 곳곳에 서 있는 야자나무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따뜻한 공기가 폐로 들어오고, 먼지와 돌, 그리고 아침이 시작되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사막의 밤은 차가웠지만, 태양은 빠르게 모든 것을 데워 가고 있었다. 저 너머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신전 안쪽에서는 아침 바람이 거대한 기둥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이 순간, 룩소르는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천 년 전, 해가 뜨는 동안(東岸)의 신전들은 제사장들과 신관들로 붐볐다. 이곳은 신에게 바쳐진 거대한 신전들이었다. 제사장들은 산자의 땅을 밟고 살아가며 향을 피우고, 신들에게 바칠 제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정화 의식을 마친 후 태양을 향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와 여러 여행객들은 그들의 시간 위를 걷고 있었다.
내가 딛는 이 돌길 위로 수천 년 전에도 사람들이 걸어갔다. 제사장들이 신의 의식을 위해 이 길을 따라 걸었고, 파라오가 행렬을 이끌며 위엄 있게 지나갔다. 그들의 발걸음은 사라졌지만, 이 땅은 여전히 그 시간을 품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거대한 기둥들 사이로 스며들면서 신전 안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행객들은 조용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곳에 서면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떤 이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벽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감촉을 느꼈고, 어떤 이는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쉬며 이곳에 흐르는 시간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이곳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여전히 신성한 공간이었다. 돌벽 하나하나에 깃든 의식의 흔적, 빛이 드리운 기둥 위에 남아 있는 역사, 그리고 우리가 감히 닿을 수 없는 거대한 흐름. 그렇게 햇살은 점점 강해지고, 신전은 아침의 빛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침묵 속에서 이곳을 걸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경이로움.
영적인 위엄.
그리고 인간을 초월하는 시간의 힘.
나는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이제 시장으로 가볼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삶이 시작되는 곳으로.
나는 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점점 활기를 띠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가게들에는 형형색색의 옷이 걸려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작은 등불들이 낮에도 어둑한 통로를 환하게 밝혔다.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 상인들의 흥정하는 목소리, 그리고 가끔씩 오토바이가 좁은 길을 가로지르며 울리는 경적 소리가 뒤섞였다.
골목을 빠져나가자, 더욱 활기찬 시장이 펼쳐졌다. 한쪽에서는 커다란 물 주전자 옆에서 한 노인이 터키시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그의 손은 익숙하게 커피를 담은 작은 주전자에서 향기로운 커피를 따르고 있었다. 커피는 한 번, 두 번 뜨거운 물로 따라내며 불순물을 없애고, 그 사이로 진한 향기가 퍼졌다. 노인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커피를 돌리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준비했다. 커피가 담긴 작은 잔을 손님에게 내밀며,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세월이 묻어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밝았다.
조금 더 걸어가자, 야외 시장의 풍경이 한층 넓어졌다. 물고기 상인들이 갓 잡은 생선을 가지런히 놓고 있었다. 물고기들의 은빛 비늘은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상인들은 손짓을 하며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팔고 있었다. 옆에서는 붉은 양파가 가득 쌓인 바구니들이 놓여 있었고, 사람들이 그것을 고르며 상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정해진 규칙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시장 한복판을 지나면서 나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자연스레 몰입하게 되었다. 한 여인은 작은 바구니를 들고 신선한 채소를 고르며 물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와 짧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구석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시장의 복잡한 분위기 속에서 어울려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무리의 아이들이 머리 위에 갓 구운 빵을 얹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흔들리지 않게 균형을 맞추며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어린 나이지만 이미 일상 속에서 배운 것들이 느껴졌다. 시장 속에서 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든 사람은 이곳에서 자신의 일상을 이어가며, 바쁘게 움직이는 동시에 이 공간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일강이 이곳 사람들의 생명을 지탱한다면, 시장은 그들의 일상과 삶의 원동력이 되는 곳이었다.
나는 그 풍경을 잠시 바라보며 길을 계속 걸어갔다.
이제, 다시 나일강을 따라가는 길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시장을 빠져나와 나일강이 보이는 곳까지 걸어갔다. 멀리서부터 강이 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스치듯 강물을 어루만지고, 작은 파문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물결은 조용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일강은 언제나 이곳에서 흘러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강은 단순한 물줄기가 아니다
이집트의 사람들에게 나일강은 곧 삶의 근원이자 죽음의 문턱이었다. 나일강이 넘쳐흐르면, 사람들은 기뻐했다. 강물이 범람한 뒤 땅은 비옥해졌고, 씨앗을 뿌릴 수 있었다. 한 해 농사가 강물에 의해 결정되었고, 강이 풍성할수록 사람들의 삶도 풍요로워졌다. 나일강은 그들에게 곡식을 주었고, 물을 주었으며, 나일을 따라 형성된 마을에서 삶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일강이 모든 것을 주는 만큼, 모든 것을 앗아갈 수도 있었다. 어떤 해에는 강물이 넘쳐 마을을 삼켰고, 어떤 해에는 가뭄이 들어 사람들을 굶주리게 했다. 강물의 범람은 곧 신들의 뜻이었고, 가뭄과 홍수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나일강이 살아있지 않으면, 사람들도 살아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었다.
나는 강둑을 따라 걸었다. 강가에는 한 남자가 그물을 펼쳐 물속으로 던지고 있었다. 옆에서는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손짓을 따라 하며 조심스럽게 그물을 당겼다. 아버지는 숙련된 손놀림으로 강물을 가르며 어부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는 물속에서 반짝이는 물고기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낚시는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가는 기술이었고, 가족을 돌보는 방식이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강 위에 작은 나룻배가 떠 있었다. 한 남자가 나무 노를 힘차게 저으며 강을 건너고 있었다. 노를 저을 때마다 강물은 잔잔한 파문을 만들었고, 그 파문은 금세 사라졌다. 그는 강 저편으로 조용히 나아가고 있었고, 그의 뒷모습은 이 강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강은 사람들을 저 너머로 데려가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을 넘어 서쪽으로 가면, 태양이 저무는 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믿었다. 파라오들이 사후 세계로 가는 길목에 자신의 무덤을 둔 것도, 나일강이 삶과 죽음 사이를 가로지르는 신성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강을 건너면, 우리는 더 이상 생의 영역이 아닌 곳으로 향하게 된다.
나는 천천히 강둑에 서서, 나일강을 바라보았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이 강은 변함없이 흐를 것이다. 수천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이 강에서 생명을 얻을 것이고, 또 이 강을 넘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물을 긷고, 가족을 돌보고, 하루를 살아간다. 나는 이제 나일강을 건너야 한다.
삶을 떠나, 죽음이 머무는 땅으로.
룩소르 동안(東岸)에서 보이는 서안(서안)의 모습은 드넓은 사막과 거진 바위산이 펼쳐져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가친 바위산은 '죽은 자들의 땅'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곳이 단순한 ‘죽은 자들의 땅’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그들의 삶은 나일강과 함께 이어져왔다.
나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옆으로 좁은 수로가 흐르고 있었고, 수로 양옆으로는 여러 모양의 집, 논밭이 드러서 있었다. 사막과 맞닿아 있는 이곳에서도 이렇게 푸르른 들판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물길을 따라 자란 풀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일렁였고, 하얀 새들이 논 위를 날며 먹이를 찾고 있었다. 수로를 따라 나오니 한 부자(父子)가 허리를 숙이고 작물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마른 흙이 묻어 있었고, 그는 조심스럽게 추수한 사탕수수 줄기들을 쌓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곳은 그저 지나치는 들판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다. 나일강의 물길을 따라 형성된 마을에서 사람들은 태어나고, 일을 배우고,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한 무리의 양 떼가 천천히 길을 건너고 있었다. 목동은 양을 이끌었고, 한 여인은 머리 위에 풀을 가득이고 조용히 지나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고, 이 길을 수십 번, 수백 번 걸었을 듯한 모습이었다. 길가에는 소와 당나귀들도 보였다. 말없이 풀을 뜯는 모습이 평화로웠고, 먼지 쌓인 길 위로 그들의 발소리가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마을로 들어서자, 벽돌로 지어진 작은 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 남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비둘기장을 가리켰다. 그의 손에는 갓 태어난 비둘기 두 마리가 있었다. 아직 깃털이 다 나지 않은 비둘기들은 눈을 꼭 감고 있었고, 그의 손바닥 위에서 작게 숨을 내쉬었다. “이 비둘기들은 식용으로 키웁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벽 한쪽에는 작은 구멍들이 줄지어 나 있었고, 그 안에는 어미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고 알을 품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곳에서는 가축뿐만 아니라 비둘기도 중요한 식량원이 되어 왔다.
조금 더 걸어가자, 매캐한 연기와 함께 구수한 빵 냄새가 풍겨왔다. 한 여인이 커다란 점토 화덕 앞에 앉아 불을 피우고 있었다.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이어져 온 방식 그대로였다. 흙벽돌로 만든 화덕에서 불길이 일렁였고, 그녀는 반죽을 손으로 눌러가며 조심스럽게 화덕 안으로 밀어 넣었다. 벽돌 안쪽에는 둥글고 두툼한 빵들이 익어가고 있었다. 이것이 이집트 전통 빵, '에이쉬 샴시(태양빵)'이었다. 나는 빵 굽는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한때 파라오들이 이 땅을 다스렸고, 신전이 세워지고, 무덤이 조성되었던 이곳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빵을 굽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멤논의 거상은 묵묵히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석상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는 몇 명의 남자들이 땅을 파며 유적을 발굴하고 있었다. 흙을 조심스럽게 걷어내며 과거의 흔적을 찾아내는 모습이 마치 이 땅이 간직한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처럼 보였다. 한쪽에서는 발굴된 돌조각을 살피며 신중하게 기록하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발굴 현장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단순히 ‘죽은 자들의 땅’이 아니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밭을 일구고, 양을 돌보며, 비둘기를 키우고, 화덕 앞에 앉아 빵을 굽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여행자들이 지나가며 이 땅이 간직한 시간의 흔적을 느끼고 있었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 떠 있었고, 공기는 뜨거웠지만 바람은 여전히 이곳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돌려 다시 나일강 쪽으로 향했다. 이제, 삶이 시작되는 동쪽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난 350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하며 말을 걸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어떠한 이야기를 해줄까.
사진: 나그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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