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 - 아버지
From 1919 to 2022
종기는 그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종기는 합격증을 들고 지수에게 달려와 이건 사법시험 합격증이 아니라 혼인 확인증이라며 지수에게 달려왔지만, 정작 지수는 걱정이 앞섰다. 엄마 때문이었다. 나라 일이라면 자다가도 경기를 하는 엄마에게 종기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가 난감했다.
“우리는 그 사람들 하고는 안 맞는다. 대대로 그랬어. 그냥 좋은 회사 다니는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
서희가 그리 애절하게 지수를 말리자. 종세가 지수를 거들었다.
“우리가 그리 험난했던 것은 전쟁 때문이었소. 이제 전쟁도 아닌데 그건 아닌 것 같으니 지수 뜻대로 합시다. 종기라는 아이도 그만하면 좋지 않소”
서희는 며칠을 골몰했다. 무엇을 보아도 지수와 종기의 혼인은 막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서희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사라져 버리는 이 집안 남자들의 악연이 지수에게도 계속될까 그것이 무서웠다. 서희는 지수가 지 아빠같이 가족만 아는 사람이면서 능력 있는 사람을 만나길 원했고, 종기는 그런 사람인 것 같기는 한데 하필 나라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니 알 수 없게 불안했다. 서희의 반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서희의 반대는 실체가 없었다.
결정이 되자 서희는 요란해졌다. 서희의 결혼식은 외로웠다. 서희는 아버지가 없는 결혼식을 올렸고, 스미스가 도와주었지만 중정에 말이 들어갈까 두려워 청첩장도 제대로 돌리지 못했다. 혼주석에 홀로 앉아 있는 분옥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무너져 내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종세의 얼굴만 쳐다보다가 서희의 결혼식은 끝났다.
서희는 쌍문동 사람은 모두 올 수 있는 결혼식을 원했다. 종세는 그러다 병원이 거덜 나겠다고 투정했지만, 서희는 병원은 다시 하면 되지만 결혼식은 한 번하는 것 아니냐며 종세가 뭐라 하든 서희는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지수와 종기는 결혼을 하고도 곧바로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다. 지수는 종기의 사법연수원 연수기간과 시간이 안 맞아 다음 해 봄 서희와 함께 뉴욕으로 신혼여행을 가기로 했다. 서희는 너희들 신혼여행에 날 왜 데려가냐고 극구 거절했지만 지수가 고집을 부렸다.
지수의 결혼이 결정되고 나고서 서희는 지수와 종세 모르게 마당 한구석에서 밤새 소리 없이 울었다. 스미스가 떠나고 없었다. 스미스는 암으로 투병하면서 서희에게 마지막 전화를 했다. ‘널 결혼시키 듯 지수 결혼도 꼭 보고 싶었는데, 하나님께 너무 큰 행복을 원했던 것 같다’며 가늘고 긴 숨을 쉬고 하나님의 곁으로 갔다.
서희는 미국으로 가야 했지만, 지수의 결혼식으로 가지 못했고 서희는 밤새 울었으나 지수나 종세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행복한 척하고 드센 척하며 쌍문동 사람들 모두를 지수 결혼식에 데려가려고 애를 썼지만, 아무도 없는 밤에 밀려오는 스미스에 대한 그리움은 참아낼 수 없었다. 너무 보고 싶었는데, 그리도 예뻐하던 지수의 웨딩드레스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세상이 다 무너져도 스미스는 서희 곁에 있어야 했다.
서희는 열네 살이 되던 해 피난길에 거지가 되어 나타난 분옥과 서희 모녀를 본 스미스의 놀란 얼굴이 잊히지가 않았다. 스미스는 갑자기 나타나 울고 있는 두 모녀를 보고 놀랐지만 굶어서 누렇게 뜬 서희를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덥석 안고 식당으로 갔다. 서희가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먹자 스미스는 서희의 음식을 뺏어 한 입씩 떠 먹였다.
서희는 스미스의 생전에는 스미스가 있는 미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희에게는 너무 먼 땅이었다. 스미스가 보고 싶다고 휑하니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이젠 이 세상에 없다고 하니 더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었다. 너무 그리웠다.
종세는 그런 서희를 보고 둘이서 미국에 다녀오자고 했지만, 서희는 지수가 결혼하고 안정되면 그때 가자고 했고, 지수는 서희와 함께 스미스가 있는 뉴욕으로 신혼여행을 가자고 했다. 지수도 스미스에게 종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얘들아 엄마 여기서 좀 있으면 안 될까. 여기서 좀 있고 싶어”
지수와 종기를 보내고, 서희가 스미스가 있는 뉴욕 어느 공원묘지의 묘비 앞에 앉았다.
“저 왔어요. 애들 잘 봤죠. 정말 이쁘지요. 저 잘했죠?”
“고마워요. 저 정말 잘 살았어요. 좋은 신랑 만나서 이쁜 딸 낳고 잘살았어요. 이게 다 당신이 주신 거예요”
“고마워요. 아버지!”
서희가 오래도록 서럽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