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 - 너만 몰라!
From 1919 to 2022
지수가 백골단에 끌려가고도 아무 일도 없이 곧바로 풀려나자 학교에서는 모두들 지수의 뒤에서 수군거렸다. 무슨 대단한 권력자의 딸이라고도 했고, 밀고한 변절자일 것이라고도 했다. 지수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붙잡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설명을 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신경을 끄는 것이 상책이었다.
숙희로부터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지수가 그 난리를 치르며 대학을 다니는 사이 숙희는 여느 대학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숙녀가 되어있었다.
혜화동 대학로는 검은 아스팔트를 빨간 아스팔트로 덧칠하고 주말에는 차가 없는 젊은이의 거리가 돼서 마로니에 길이라고 불렸다. 지수와 숙희는 만나자마자 부둥켜안고 깔깔거리며 마로니에 길을 종종거렸다.
“숙희야 너 시집가야겠다. 어쩜 그렇게 어른스럽니?”
“늙었다는 소리로 들린다. 안 그래도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
“한국은행은 뭐하는 곳이야?”
“은행들의 아버지라고 할까. 암튼 손님도 없는 은행이 뭐 그리 맨날 바쁜지 사람을 잡는다”
“거기 잘난 사람들 많지 않니? 확 낚아채지 그러니 깔깔”
“그 잘난 놈들이 허구한 날 미스김을 찾는다. 글쎄 내가 지들 다방 레지인 줄 알아요. 그러면서 뭔 계산을 그렇게 시키는지 숫자가 어마어마 해.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아참 종기 군대 간단다. 같이 한번 만나자고 하던데?”
지수는 대학에 들어간 뒤 한 학기가 지나도록 한 번도 종기를 보지 못했다. 군대를 간다는 숙희의 소식에도 시큰둥했지만 그래도 친구가 군대에 간다는데 굳이 만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입대를 앞둬서 그런지 종기의 얼굴이 많이 헬슥했다.
숙희가 종기에게 물었다.
“그런데 군대를 좀 일찍 가는 거 아니니?”
“그렇게 됐어. 집에서도 성화고 밖에서도 성화고”
“왜? 무슨 일 있어?”
“데모하는 게 들켜서 집에서 난리가 났어. 작은아버지가 검사시거든 아버지에게 빨리 잡아다가 군대에 보내라고 하도 난리를 쳐서”
지수는 데모와 검사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네가 데모를 했어?”
“뭐 심하게 한건 아니고. 모두가 나서는데 빠질 수도 없었지만, 그게 옳다고 생각했어. 작은아버지가 개입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아무튼 그렇게 돼버렸다”
지수는 지난번 안기부에 끌려갔던 일을 숙희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종기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했다.
“그럼 부모님 때문에 군대 가게 된 거니? ”
“글 세다. 부모님은 내가 작은아버지 따라서 검사가 되길 바라 시는데 데모하면 어쩌냐고 하면서 작은아버지도 난리를 치고 하니까”
“그래서 검사가 되겠다는 거야?”
“모르겠어! 군대부터 다녀와야지 뭐 검사는 그냥 되는 건가. 꿈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고 그렇다는 거지. 하지만 부모 핑계로 나만 도망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아. 요즘 학교에서 애들이 진짜 목숨 걸고 있거든”
종기의 표정이 우울하고 심각했다.
“야! 군대 가는 게 어디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것 저것 생각할게 뭐 있어. 우선 네 몸부터 챙겨 일단 무사히 다녀오고 나서 생각하자!”
지수가 호기롭게 종기의 어깨를 쳤다. 숙희도 지수를 따라 종기의 어깨를 쳤고, 종기는 그래도 여자 친구가 둘이나 이렇게 입영전야를 해줘서 행복하다며 헤벌죽 했다.
지수와 숙희 그리고 종기의 젊은 밤이 깊어졌다.
“너만 몰라!”
종기는 헤어지는 길에서 술에 취해 지수에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