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 - 여인숙
From 1919 to 2022
1986년 서울은 아시안 게임에 열광했다. 2년 뒤에 있을 88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전력을 다해 서울을 치장했다. 쌍문동의 옆에 있던 상계동 판자촌은 신도시를 마련한다는 계획으로 무계획하게 허물어졌다. 벽안의 정일우 신부와 수녀들까지 판자촌 사람들과 항거했지만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깡패를 동원했다. 깡패들은 수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냈다.
종기는 강원도 산골 전방부대에 있었다. 종기의 부대는 그 산골에서도 휴전선을 가로질러 더 깊게 숨어있었다. 종기는 그곳에서 경준을 만났다. 종기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경준을 보지 못했는데, 경준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찌감치 직업군인으로 입대해서 벌써 선임하사가 되어 있었다. 종기는 어엿한 간부가 된 경준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경준이 종기를 알아보고 반갑게 다가왔다.
“너 종기 아니냐?”
“네 일병 김종기! 누구신지 …”
“나 경준이야 새꺄! 하하하”
경준은 종기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경준은 종기에게 여긴 둘만 있으니 편하게 하라며 담배를 권했다.
“어떻게 여기서 널 보냐. 생활은 괜찮냐?”
“응 그럭저럭 지낼만해. 근데 너 멋있다”
“푸하하하 난 군대가 체질인갑다”
“아무튼 힘들면 말해 멀리 있는 장군보다 가까운 선임하사가 더 난겨”
그렇게 한 참을 떠들다 경준이 일어서려고 하는데 종기가 무엇을 계속 망설였다.
“왜 무슨 일 있어? 말해봐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면 해줄게. 누가 너 때리냐?”
종기는 지수가 보고 싶었다. 헤어지던 날 술에 취해 그렇게 쏘아붙이고 도망치듯 입대하고는 하루도 잊지 못했다. 그때 차라리 제대로 고백을 했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후회했다. 종기는 강원도 산골의 칼바람 속에서도 그 일을 잊지 못했다.
“경준아 … 사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
종기가 답답하게 경준에게 꺼낸 부탁은 지수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넌 간부니까 밖에 나가는 길에 지수에게 전화 좀 해줘”
경준은 종기에게는 걱정 말라고 했지만 걱정이었다. 지수에게 전화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지수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경준은 ‘아~ 그 새끼 참 차라리 빵을 사달라고 할 것이지 …’라고 하면서 공중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경준의 전화를 받은 지수는 깜짝 놀랐다. 경준은 종기의 소식을 전하며 면회를 오려면 어디를 통해 어디로 와서 어떻게 연락을 하면 된다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종기가 그토록 지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은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경준은 그것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지수는 종기가 그날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고 나서야 숙희에게 지난 이야기를 들었다. 박노준 야구공의 주인이 종기이며, 처음부터 지수를 좋아했던 종기의 눈치를 알고 있었지만 둘 사이가 너무 냉랭해서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지수는 아침 일찍 강원도 화천으로 떠났다. 숙희와 같이 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건 숙희에게 더 미안한 일이었다. 종기는 입대한 후 지수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썼다. 사랑한다는 말은 없었으나 사랑한다는 말이었고, 힘들지는 않다고 했지만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지수는 종기를 사랑하기보다 연민하게 되었다. 화천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종기의 부대는 그곳에서도 버스를 갈아타고 한 참을 더 들어가야 했다.
면회소에 도착한 지수는 눈앞이 노래졌다. 종기의 부대가 비상이 걸려 전방으로 급히 투입되는 바람에 면회가 안된다고 연락이 왔는데, 그러는 사이 하루에 두 번 있다는 버스시간이 지나버린 것이었다. 지수는 어찌할 방법 없이 동동거렸다. 지수는 종한 삼촌에게 연락할까 하다가 너무 일을 크게 만드는 것 같아 우선 경준을 찾았다.
지수의 연락을 받은 경준은 이런 일이 종종 있다며 일단은 그날 밤 지수가 묵을 방을 찾아 주었다. 면회소 옆에 있는 흙길가의 허름한 여인숙이었다. 경준은 지수를 안심시키고 종기를 데려올 방법을 찾아볼 테니 쉬고 있으라고 했다.
지수는 이일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가 두려웠다. 귀신같은 엄마 눈치에 서툰 거짓말이 통할 리가 없었고, 지금 상황이 그런 거짓말로 넘어갈 문제도 아니었다. 지수는 질끈 눈을 감고 여인숙에서 내준 전화기를 들었다.
지수의 이야기를 들은 서희는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 종한 삼촌에게 연락하지 않아도 되는 거니?”
그렇다는 지수의 말에 서희는
“어쨌든 안전하다고 하니 그 걱정은 않으마. 잘 챙기고 내일 날이 밝으면 곧바로 오너라.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바로 종한 삼촌을 찾아야 해 알았지”
담담한 서희의 대답에 지수는 큰 숨을 쉬고 여인숙 방 안으로 들어와 벽에 기대어 앉았다. 방은 작고 퀴퀴했으며 이불은 얼룩졌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소리는 스산했고 그 샛바람 때문인지 대롱대롱 매달린 백열등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해가 지고 어두워 지자 얇은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소리가 더 거셌다. 지수는 무서웠다. 그때 경준이 밖에서 지수를 불렀다. 경준은 어떻게든 손을 써서 종기를 불러낼 것이며 안되면 적어도 내일 아침에는 종기를 볼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너 밥 안 먹었지”
“이 시간에 여기서 어디 밥 먹을 때는 없고 내가 주인집한테 말해서 라면 끓여올게”
지수는 사양했으나, 사실 배고팠다. 종기를 만나면 뭐라도 사 먹일까 했는데 이런 외진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경준은 사발에 담긴 라면을 쟁반에 들고 들어왔다.
“야~ 내가 살다 살다 지수 너랑 이런 데서 같이 라면을 먹을 줄은 몰랐다”
지수가 샐쭉하니 경준을 째려봤다.
“아니 뭐 그렇다고 허허허 어서 드시기나 하셔”
라면이 맛있었다. 춥고 피곤하고 배고팠던 지수는 라면이 이런 맛이었나 싶었다. 경준은 지수가 그릇을 비우는 것을 보고 지수에게 내가 부대에 들어가야 종기를 어찌해 볼 수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고 자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근처가 모두 군부대니 여기는 간첩도 못 온다며 안심시켰다.
경준이 나가고 나자 지수는 눕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 따뜻한 이불속으로 발이 들어갔다. 잠들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베개를 가슴에 안고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지수야 나 종기야. 지수야 자니?”
새벽이었다. 지수는 벽에 기대어 움츠린 채 잠들어 있었지만, 인기척에 곧바로 허리를 폈다.
“누구세요”
“나 종기야 지수야”
종기가 방안에 들어왔다. 경준은 정말 재주껏 종기를 데려왔고 남들 눈에 띌까 싶어 서둘러 종기를 지프에서 내려주고 부대로 돌아갔다.
지수와 종기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어색했다. 짧고 굵은 침묵이 그 작은 방 안에서 빙빙 돌았다. 지수가 먼저 종기에게 우선 앉자고 했다. 지수는 푸석했고 종기는 핼쑥했다. 종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그냥 널 잠시만이라도 보면 좋겠다 한 건데”
“하는 수 없지 나도 이리될 줄 몰랐으니까. 경준이가 정말 고생 많이 했다. 너무 무서웠어”
“그러게 경준이 한테 정말 큰 신세를 진 것 같아”
지수와 종기는 나란히 벽에 기대어 다른 쪽 벽을 바라보고 앉았다. 두 사람의 침묵이 창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묻혔다.
“지수야 우리 같이 늙자”
종기가 침묵을 뚫고 말했다.
“야! 아직도 젊지도 않은 것 같은데 무슨 늙자는 무슨 소리야”
지수가 고개를 고개를 돌려 웃으며 종기를 돌아보았다. 종기는 멋쩍어하며 지수를 바라봤다.
“전역하면 뭐든 제대로 할 거야. 그걸 네게 보여주고 싶어”
종기가 떨리는 손으로 지수의 손을 잡았다. 종기의 쿵쿵거리는 심장소리가 지수의 손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지수는 종기의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으나 반응하지도 않았다. 지수는 종기의 심장 소리에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겨울밤은 산골의 어둠을 타고 깊고 길게 지나쳤다. 지수는 눈을 감고 종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종기야! 우리 이제 스물셋이야.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우선 몸성히 제대나 하자”
“오늘 밤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아”
“난들 잊겠니. 아마 경준이도 평생 못 잊을걸. 종기 너 경준이 한테 평생 빚진 거야”
지수가 하얗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