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보니 첫사랑?
수재는 용해를 만나 그동안 밀렸던 얘기를 나눴다.
오랜 친구사이인 용해는 작년 봄, 부인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뒤, 두문 불출했었다.
공식적으로 몇 차례 만나기는 했지만, 단 둘이서 사적으로 만나는 것이 꼭 1년 만이었다.
"수재, 너 아직 경비 다니고 있냐?" 근황을 묻는다.
"그래, 좀 피곤한 일도 있었지만, 다닐 만 해~" 답을 했다.
"피곤한 일? 무슨 일이 있었어?" 다시 궁금하다는 듯,
"집안일이야, 마누라가 이혼하자고 하길래..." 말끝을 흐렸다.
"아니, 왜? 너같이 착실한 가장이 어디 있다고~"
"술 많이 먹는다고, 집안일 제대로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하하! 사랑싸움이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야!" 용해는 크게 웃는다.
"아니야, 진짜로 이혼하자고 했어."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침 퇴근해서 술만 먹고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아무것도 안 한다는 거야."
사실 수재는 경비일을 하면서 잠이 안 온다는 핑계로 늘 술을 먹고 하루 종일 잠을 자는 나날이 1년 가까이 해왔다. 늘 술에 취해 있다 보니, 순덕은 그 자체가 보기 싫었다. 처음에는 잔소리로 시작해서 태클을 걸고 본격적으로 제재를 가하며, 이제는 도저히 꼴을 못 보겠다는 것이다.
"수재, 네가 좀 심했네~ 술 안 먹으면 잠이 안 와?" 용해가 묻자,
"응~ 습관이 되었나 봐."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나이가 있는데, 너무 인생을 허비하는 게 아냐?"
"순덕 씨는 종갓집 맏며느리로 고생을 그렇게 하는데, 네가 좀 심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옛날에는 내조의 시대라지만, 요즘은 외조의 시대야!"
"처음에는 잔소리가 많아도 그러려니 했는데, 요즘 들어 나를 사랑하느냐, 첫사랑이 누구였냐며 이상해." 고개를 저으며 이해가 안된다는 듯 말했다.
"순덕 씨가 스트레스 많이 받았네, 좀 잘해주지." 여전히 아내를 두둔한다.
"내 마누라는 명이 짧아 먼저 갔지만, 너희 부부는 백년해로해야지, 안 그래?" 화해하라고 부추긴다.
용해는 남자는 나이가 들면 힘이 없어지고, 여자는 지나온 고생을 무기 삼아 공격한다며 좀 더 남자가 분발해야 한다는 논리로 쭉 설명을 늘어놓는다.
"아무튼 술 먹지 말고 이혼당하지 말아, 알았지?" 용해가 웃으며 파이팅을 보낸다.
"그래, 내가 별 수 있어? 마누라가 하자면 해야지." 힘없이 내뱉는다.
"수재야! 나와 등산 다니자!"
"싫어! 피곤해~"
"아니야~ 처음에는 피곤하겠지만, 자꾸 다니고 습관이 되면 괜찮아." 제의하면서 다시 강조한다.
"순덕 씨도 좋아할 거야~ 건강을 위해서 술도 끊고, 몸도 좋아지고~ 맞잖아?"
수재는 요사이 아내가 갱년기라 생각이 들었는데, 용해를 만나고 집으로 오면서 '네가 문제가 있다'는 용해의 충고를 깊게 받아들였다.
'맞아, 건강을 위해서라도 술을 끊어야겠어.' 다짐을 하며, 거울을 자세히 봤다.
축 쳐진 눈꺼풀, 듬성듬성 난 흰머리카락, 어깨와 목이 저리고 아픈 게 늙고 병든 몸, 그 자체였다.
'내가 왜 이랬지? 아니야, 아직은 노인네가 아니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디 다녀오시는 구랴~ 첫사랑 만나고 오셔?" 순덕은 기다렸다는 듯이 묻는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용해 만났어." 짧게 답했다.
"당신 잘 가는 주막, 주모가 첫사랑 많이 닮았다며?" 끈질기게 잇는다.
"누가 그래?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단호히 부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없는 사실을 마치 사실인 양 만들어 내는 아내가 야속했다.
"그러면 왜 그 주막에 자주 가는 거야?" 계속 물고 늘어진다.
"그냥 갔지~ 이제는 안 갈 거야, 술도 안 먹을 거고..." 힘없이 말했다.
"당신, 내가 뭐가 좋아 선택했겠어?" 갑자기 긴장이 고조되는 말투다.
"...."
"처음 만날 때, 술을 입에도 못 댄다고 했어. 그래서 믿고 받아들였지." 무슨 말을 할지, 뜸을 들인다.
"난, 처녀시절에 아버지처럼 술 먹는 남자를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어."
"...."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나를 속였어!" 점점 거칠어진다.
"당신, 나 처음 만날 때 술 못 먹는다고 했어? 안 했어?" 몰아친다.
"33여 년이 지난 지금에 기억이 잘 안나지..."
"흥! 그래~ 33년여 년 넘게 실컷 마시고는 술을 끊겠다고?" 비웃듯, 코웃음을 친다.
"아니야~ 진짜, 술 안 먹을 거야~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믿어줘." 애원한다.
"두고 봅시다. 얼마나 가는지..." 역시 못 믿어한다.
용해의 말처럼 확실히 지나간 고생을 무기로 공격한다. 그리고 엉뚱한 말과 행동도 거침이 없다.
수재는 잠시, 아내와 살아온 지난 세월을 회상했다.
아내는 이웃의 중매로 만났다. 맞선을 보고 3개월 후, 전격적으로 결혼을 했다. 한마디로 청순하고 예쁜 용모에 첫눈에 반했다. 반면에 아내는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장인어른께서 더 좋아라 해서 결혼이 성사되었다.
어쨌든 가난하고 형제들 많은 종갓집에 시집와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늘 웃고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었다.
수재 역시 40년 넘게 가족을 부양하며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며 열심히 달렸고 꿋꿋하게 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
어려운 살림에 항상 수고가 많다고 말없이 응원하며, 아내와 별 탈 없이 지내왔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아내가 바가지를 심하게 긁어 댔다. 갑자기 자기를 사랑하냐고 묻기도 하고, 돈을 실컷 만져보는 게 소원이라고도 하며 박봉을 은근히 경멸하는 듯했다. 그래서 갱년기라고 생각하고 이해를 했던 것이다.
수재는 "자기, 나 사랑해?" 아내가 묻는 이 말에 대한 뾰쪽한 해답이 없다.
또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도 아직도 모를 일이다.
'단지 쑥스럽게 답을 못했지만, 좋아했기에 결혼을 했고 애까지 낳고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게 사랑하는 거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사랑을 증명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왜, 여자들은 꼭 사랑을 확인해야 하는 것일까?' 참으로 궁금하다.
그리고 첫사랑 운운하는 것도 그렇다. 착실한 성격 탓에 부모님 속 안 썩이고 결혼 적령기에 또 결혼했는 평범한 가장에게 첫사랑은 무슨 말인지, 골치가 아프다.
사랑은 황홀하고 멋진 것이라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골머리가 아플 정도로 궁금한 것 같으면 차라리 사랑은 하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사랑은 잘 모르겠고 살다 보니, 정이 들었고 그게 사랑으로 변한 것 같다.
아내 역시도 사랑을 모르니, 자주 말도 안 되는 첫사랑 타령을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