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화_늦게 잠들었다.

D+231

by 이아진 leeAjean

늦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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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31.



비번이었다. 7월의 토요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방 안이 이미 밝았다.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하얗고 강했다.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한동안 누워 있었다. 천장을 봤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오후가 되면서 공기가 무거워졌다. 습기가 피부에 붙었다. 아파트를 나서자 아스팔트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수잔에게서 메시지가 왔었다. 오늘 영화 보자고. 나는 “괜찮아”라고 답했다. 수잔이 “맨날 괜찮대”라고 보냈다.


차에 탔다. 시동을 걸었다. 에어컨을 켰다. 시트가 뜨거워서 등이 땀에 젖었다. 핸들도 뜨거웠다. 겨울에는 차가웠던 핸들이 여름에는 뜨거웠다. 에어컨이 차 안을 식히는 데 시간이 걸렸다. 차 안에 갇혀 있던 열기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수잔을 데리러 가는 길이었다. 수잔의 아파트는 시내 반대편에 있었다. 차로 15분 거리였다.


도로 위에 열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지랑이였다. 겨울에는 없는 것이었다. 겨울에는 들판이 회색이고 공기가 투명했다. 여름에는 모든 것이 녹색이고 공기가 흔들렸다. 가로수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수잔의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웠다. 잠깐 기다렸다. 창밖으로 아파트 입구가 보였다. 로비 유리문에 햇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2분쯤 지나서 수잔이 나왔다. 반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걸음이 가벼웠다. 차 문을 열고 타면서 선글라스를 벗어 조수석 대시보드 위에 올려놓았다.


“에어컨 좋다.”


“더워?”


“밖에 찜통이야.”


라디오를 켰다. 뉴스가 나왔다. 채널을 돌렸다. 노래가 나왔다. 기타 반주에 여자 목소리. 가사가 들렸다. 사랑이 어쩌고 하는 내용이었다. 난 잠깐 듣다가 껐다.


“왜 꺼?”


“그냥.”


수잔이 더 묻지 않았다. 에어컨 바람 소리만 차 안을 채웠다. 창밖으로 7월의 거리가 지나갔다. 사람들이 반소매를 입고 걸었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줄이 서 있었다. 가로수 그늘 밑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매표소 앞에서 잠깐 기다렸다. 쇼핑몰 안은 에어컨이 세게 돌고 있었다. 밖에서 들어오면 피부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땀이 식으면서 차가워졌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커플,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 혼자 온 사람. 아이가 팝콘을 흘리면서 걸어갔다. 팝콘 냄새가 매표소 쪽에서 흘러왔다. 버터와 소금 냄새. 단 냄새도 약간 섞여 있었다. 카라멜 팝콘을 파는 곳이 옆에 있었다.


벽에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남녀가 안고 있는 영화, 총을 든 군인이 있는 영화, 애니메이션. 군인 포스터 속 남자는 헬멧을 쓰고 정면을 보고 있었다. 눈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기지 정문에 붙어 있던 포스터와 비슷한 구도였다. 시선을 돌렸다. 수잔은 그 포스터를 보지 않았다.


수잔이 표를 샀다. 남녀가 안고 있는 영화였다.


“이거 어때.”


“괜찮아.”


상영관은 반쯤 차 있었다. 에어컨이 강하게 나오고 있어서 팔이 서늘했다. 좌석이 빨간색이었다. 나는 수잔 오른쪽에 앉았다. 팔걸이가 사이에 있었다. 수잔의 팔꿈치가 팔걸이에 닿아 있었다. 자리에 앉자 수잔이 팝콘 봉지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봉지에서 버터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하나 집었다. 소금 맛이 났다. 버터 맛도 났다. 짜고 고소했다. 수잔은 팝콘을 좋아했다. 영화를 보러 갈 때마다 큰 사이즈를 샀다.


잠시 후 불이 꺼졌다. 상영관이 어두워졌다. 화면이 켜지면서 상영관이 파랗게 물들었다. 앞줄 사람들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보였다. 수잔의 얼굴에 화면 빛이 닿았다. 옆에서 보이는 윤곽이 파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코끝과 이마가 빛을 받고 있었다. 예고편이 시작됐다. 큰 소리와 밝은 화면이 연속으로 지나갔다.


영화가 시작됐다. 남자와 여자가 나왔다. 만나고, 다투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이야기였다. 배경은 어느 도시였다. 비가 자주 내리는 도시. 남자가 우산을 들고 여자를 기다리는 장면이 있었다. 수잔이 팝콘을 집었다.


카메라는 그 얼굴들을 오래 비췄다. 뭔가를 느끼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표정이 바뀔 때마다 관객석이 따라갔다. 웃고, 훌쩍이고, 숨을 참았다. 수잔도 따라가고 있었다. 팝콘을 집는 손이 멈추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수잔의 옆에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같은 화면을 보고 있는데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수잔은 이야기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보고 있었다. 카메라가 잡은 얼굴의 크기, 각도, 조명. 화면 속 사람의 얼굴이 크게 잡힐 때, 줌 다이얼이 생각났다.


중반부에 주인공의 어머니가 병실에서 죽었다. 주인공이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음악이 낮게 깔렸다. 피아노였다. 한 음, 한 음 천천히. 카메라가 그 얼굴을 오래, 아주 오래 비췄다. 눈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목젖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상영관 전체가 조용해졌다. 팝콘 씹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한 명이 아니었다.


수잔이 눈물을 닦았다. 손등으로 빠르게. 한 번, 두 번. 그것을 봤다. 화면 속 사람이 울고 있었고 수잔이 울고 있었다.


나는 팝콘을 씹었다.


후반부에 장면이 바뀌었다. 헬기, 정글, 특수부대원들이 뛰어내렸다. 총알이 슬로모션으로 날아갔다. 적이 쓰러졌다. 카메라가 클로즈업했다. 음악이 웅장해졌다. 적이 쓰러질 때 먼지가 피어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느리게, 아름답게 촬영된 먼지였다.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실제로는 먼지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모니터 속 먼지는 회색이었다.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소리는 둔탁하고 짧았다. 음악은 없었다. 화면이 흔들렸다가 멈췄다. 나는 피식 웃었다.


수잔이 나를 봤다. 어두운 상영관에서 수잔의 눈이 보였다. 왜 웃었는지 묻는 눈이었다. 나는 화면을 봤다. 영화 속 군인이 전우를 안고 울고 있었다. 음악이 슬프게 바뀌었다. 관객석에서 또 코를 푸는 소리가 났다. 나는 팝콘을 하나 더 집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다. 사람들이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저기서 코를 푸는 소리, 가방 챙기는 소리가 났다. 형광등 빛이 눈에 찔렸다. 아까까지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눈이었다. 수잔이 눈을 비볐다. 눈이 빨개져 있었다. 울었던 흔적이었다.


“좋더라.”


“응.”


수잔이 날 봤다.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감상, 어떤 반응. 난 “응”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 수잔이 시선을 거두고 가방을 들었다.


쇼핑몰 복도로 나왔다. 사람들이 많았다. 매장에서 음악이 흘러나왔고 조명이 밝았다. 영화관의 어둠에서 나오니 모든 것이 과하게 밝아 보였다. 수잔이 눈을 찡그렸다. 에스컬레이터 옆으로 걸었다. 수잔이 내 팔에 자기 팔을 걸었다. 손이 따뜻했다. 영화관 에어컨에서 차가워진 피부가 수잔의 체온에 데워졌다.


“배고프지 않아?”


“샌드위치 먹자.” 내가 말했다.


“또 샌드위치야?”


“괜찮잖아.”


수잔이 피식 웃었다.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가 풀렸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매장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옷 가게, 신발 가게, 액세서리 가게. 수잔이 가끔 쇼윈도를 봤다. 나는 보지 않았다. 수잔이 카페 앞에서 멈췄다. 카페 유리문 안으로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 어때.”


“괜찮아.”


“맨날 괜찮아!”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에어컨 바람과 커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원두를 갈고 있는 기계 소리가 들렸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수잔은 가방을 의자 옆에 걸었다. 가방에 걸려있던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창밖으로 쇼핑몰을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쇼핑백을 든 사람,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 손을 잡고 걷는 사람.


“영화 결말 좀 뻔하지 않았어?”


“그랬나.”


“그래도 배우가 잘하더라. 우는 장면.”


“응.”


커피가 나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잔에 얼음이 가득했다. 수잔이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찬 잔이었다. 잔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물방울이 수잔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수잔이 잠깐 창밖을 봤다가 시선을 내렸다. 빨대를 입에 물었다가 놓았다. 마시지 않았다.


“카엘.”


“응.”


“우리 처음에 영화 보러 갔던 거 기억해?”


기억하지 못했다. 언제였는지, 무슨 영화였는지. 배치되기 전이었을 수도 있고, 배치된 직후였을 수도 있다. 수잔은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울었다는 것까지. 그것은 수잔에게 중요한 기억이었다.


“슬픈 장면에서 네가 나보다 먼저 울었잖아.”


수잔이 나를 봤다. 나는 커피잔을 봤다. 잔 안쪽에 커피 자국이 얇게 남아 있었다. 잔 표면의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랬었나?”


수잔이 잠깐 그대로 있다가 시선을 내렸다. 커피잔 위의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우리 헤어질래?”


커피잔 안의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딸깍. 작은 소리였다. 카페의 재즈 음악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웃었다.


“알겠어.”


수잔이 잠깐 나를 봤다. 눈이 커졌다. 그 대답을 예상했는지 못 했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니, 물어본 거야.”


카페 안에서 다른 테이블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스피커에서 재즈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피아노 솔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천장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수잔의 가방이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다. 연한 회색이었다.


나는 수잔을 봤다. 수잔의 눈이 젖어 있었다. 속눈썹에 물기가 맺혀 있었다. 뭔가를 말해야 할 것 같았는데 뭔지 몰랐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안 헤어지자, 라고 말할 수 있었다. 왜, 라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열었다.


“…응.”


수잔이 눈물을 닦았다. 손등으로. 아까 영화관에서와 같은 동작이었다. 나는 그 손을 봤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수잔이 가방을 다시 들었다. 의자가 타일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잘 지내.”


수잔이 카페를 나갔다. 유리문이 닫혔다. 에어컨 바람이 유리문 앞에서 흔들렸다. 문이 닫히면서 바깥의 열기가 잠깐 들어왔다가 다시 차단됐다. 창밖으로 수잔이 걷는 게 보였다. 사람들 사이로 멀어지다가 사라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만 보였다가, 그것도 보이지 않게 됐다.


수잔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까지 옆에 있었는데, 벌써 얼굴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눈의 색은 알겠는데 눈썹의 모양이 기억나지 않았다. 코는 알겠는데 입술의 정확한 선이 기억나지 않았다. 수잔의 얼굴은 벌써 흐려지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수잔이 앉았던 자리가 보였다. 의자가 약간 빠져 있었다. 수잔이 일어나면서 민 것이었다. 커피잔이 그대로 있었다. 잔 안쪽에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연한 분홍색이었다. 잔에 반쯤 남아 있는 커피가 보였다. 얼음이 녹아서 연해져 있었다. 잔 표면의 물방울이 테이블 위로 흘러내려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걸 봤다. 한동안 봤다. 카페 안에서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웃는 소리가 들렸다. 컵이 접시에 놓이는 소리가 들렸다. 스피커에서 음악이 계속 흘렀다. 재즈였다. 피아노와 베이스. 이 카페에서는 세상이 평화로웠다. 사람들이 웃고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나도 그 사이에 앉아 있었다. 수잔의 빈자리 앞에.


커피를 마저 마셨다.


주차장으로 갔다. 쇼핑몰 밖으로 나오자 열기가 다시 밀려왔다. 에어컨에 익숙해진 피부가 놀랐다. 주차장 바닥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차에 탔다. 시동을 걸었다. 에어컨이 다시 켜졌다. 차 안이 뜨거웠다. 시트가 등을 데웠다.


스마트폰을 봤다. 메시지가 없었다. 화면을 껐다.


창가에 화분이 보였다. 흙이 말라 있었다.


씻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늦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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