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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조셉 Oct 23. 2020

프랑스 시댁이라도 내겐 그저 시댁이다

프랑스 시월드 이야기 1

시댁 에피소드를 적으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시댁 까발리기가 결국은 내 얼굴에 침 뱉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남편에게 내 글이 불편한 진실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최대한으로 내가 보고 느낀 그 시선으로만 담백하게 적어볼까 한다.


외국에도 시월드가 존재하는가.

답은 yes.


시댁엔 껄끄러움, 불편함 그리고 어색함이 있다.


물론 나는 추석이나  7시간씩 앉아 기름 냄새 뒤집어 가며 전이나 고기산적을 구울 일은 없지만 프랑스 시댁이라도 시댁은 시댁이다.

아마도 내가 찐 한국 사람이라 보통 한국 며느리가 시댁 하면 떠올리는 기본 이미지란 것이 있어 더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친정에서처럼 시댁에서 밥 먹고 편안하게 소파에 누워서 티비를 보거나 하루 종일 늘어질 수 있는 용감함이 내겐 없다. 누구도 내게 뭐라 하지 않지만 시댁에 가면 알 수 없는 군기가 든다.


물론 우리 시부모님도 내가 프랑스 며느리가 아니라서 불편한 게 있을 거다.

난 음식을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 편이라 시부모님이 차려주시는 음식은 남기지 않고 다 먹긴 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시즌 단골 메뉴로 나오는 푸아그라 만은 입에 안 댄다. 한번 푸아그라를 만드는 과정이 찍힌 영상을 보고 난 이후 환상적인 맛을 떠나 인간의 잔인함이 만들어낸 그 기름덩어리를 더 이상 내 목에 넣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다.



문화나 언어가 다른 며느리인 나는 그분들에게 몇 점 정도 일까.

사랑받는 며느리일까 그저 그런 며느리일까. 

사실 빵점이라 해도 난 정말 상관없다.

경상도 아가씨라 타고난 애교는 원래 없고 털털한 데다 독일에서 살던 모습 그대로 딱딱함이 남아 살가운 구석은 찾아볼 수가 없는 며느리인 건 사실이다.

화장끼 없는 얼굴에 시댁에는 무조건 편한 옷이 최고다 싶어 만한 청바지 차림으로 다니 시어머니는 나보다 막내 시동생 여자 친구에게 화장품 이야기며 쇼핑 카운셀링을 많이 하신다. (막내 시동생 여자 친구는 프랑스 여자이다)

허나 실로 그것이 부럽다거나 나도 그 시시콜콜한 대화에 끼고 싶어 꼬리를 살랑거릴 정도로 나는 여우과는 아니니까 뭐 서로가 셈셈인 셈이다.

  

우리 어머님도 아셨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째 아드님이 한국 여자와 살게 되리라는 것을.


"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아 그래? 잘됐구나. 언제 소개해줄 거니?"

"근데 그전에 3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첫 번째는 그 친구가 독일에 살아요."

"아..프랑스가 아니고 독일?"

"그리고 프랑스어를 전혀 못해요."

"어이쿠 저런....."

"한국 여자예요."

"아........"


수화기 너머로 전해오는 3초간의 정적은 내가 직접 옆에서 들은 것은 아니었어도 어머니 표정을 대강은 짐작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청혼은 내가 남편에게 반협박을 해서 반지를 받았다. 어정쩡하게 반짝거리는 게 받고 싶네 이러면 또 순진한 시골총각이 못 알아들을까 봐 대놓고 "다음 선물로는 반지로 들고 와" 말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연애한 지 2년이 채 안되어서 남편은 내게 청혼을 했다.

훗날 들어서 안 얘기지만 시아버님은 너무 결혼을 일찍 결정하는 거 같다고 하셨단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프랑스 커플들이 결혼을 하지 않거나 pacs라고 하는 공식 동거 제도를 통해 가정을 꾸리는 일이 많다.


근데 유럽인이 아닌 내가 독일에서 프랑스로 나라를 옮기는 데에 우선적으로 비자가 문제가 되었다. 7년간의 독일의 안정된 생활을 뒤로하고 프랑스어 봉주르 하나만 아는 내가 프랑스로 오기에는 내게도 남다른 큰 모험이었다. 죽어도 전범국가였던 독일에는 아니 오시겠다는 서방님 고집에 우리가 프랑스에서 같이 려면 결혼이 최우선 조건이었다.


어쩌다 내가 한국 회사에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야박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모자란 프랑스어 때문에 묵묵히 입 막고 다닐 때다. 그러던 와중에 내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임신 7개월 차에 나는 보기 좋게 회사에서 잘렸다. 명목은 '계약을 더 연장해줄 수 없다'였지만 회사가 산후 휴직 그리고 육아휴직 기간을 다 묵인하며 사람을 다시 받아줄 회사가 아니었다.


옳다구나 하고 나는 내 첫아들을 내 손으로 키우면 되겠다 생각했다. 차라리 망할 놈의 회사 내가 안 다니고 말면 그만이다 생각했다.

'내 아들 첫걸음마까지는 보고 일을 찾아도 그때 찾아야지.'


아들이 첫 돌을 앞두고 뭔가 잡고 일어서기 시작할 때 시어머님께서 손자를 보러 우리 집으로 오셨다. 

시어머님은 대뜸 내게,

집에만 있기 지루하지 않니?
난 사회성이 강한 사람이라 집에서 애나 돌보고 그런 팔자가 아니더라.
밖에서 사람도 만나고 일도 하고 그런 게 좋지 뭐


그 자리에선 어머님이 그런 말을 왜 하실까 뒷목이 싸한 걸 느꼈지만 나중에 다시 곱씹으며 생각해보니 집에서 애나 보는 나를 향한 비아냥일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남편은 별 뜻 없는 얘기를 곱깝게 듣는다며 나보고 예민하다 했지만 이건 아무리 다시 고쳐 들어도 뒤통수치는 얘기인데 - 나만 그렇게 느끼나.


자기 귀한 아들이 생활비 뼈 빠지게 벌어 나는 무의 도식하는 여자처럼, 집에서 애나 보는 한가로운 여자쯤으로 보였나.

많은 프랑스 여자들이 보통은 산후 휴가 4개월만 하고 다시 100일 밖에 안 된 아기를 두고 복귀를 한다지만 내 아들 내가 보육원 안 보내고 남에 손에 안 키우고 혼자 어렵사리 키운 걸 수고했다 하셔야 맞지 않나. 그렇게 핏덩이 100일도 안된 갓난 아기를 속된 말로 돈 좀 더 벌자고 버젓이 보육원 맡기는 프랑스 여자들이 정신이 이상한 거 아닌가.


" 어머님. 너무하시네요! 

1년 넘도록 생활비 한 푼 아드님에게 받은 거 없고요 (물론 매달 시장비는 남편이 냈습니다만) 분유며 기저귀도 제가 다 어찌 모아둔 돈으로 생활했습니다.

어디서 굴러먹다 아드님 등골 빼먹는 동양 여자 저 아닙니다. " 했어야 했다.

아휴...

그 자리에서  순진하게 웃고 있었던 나 자신이 그날은 얼마나 반푼이 같았는지 한참을 혼자 이불 킥을 하고 나서야 진정이 좀 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은지 몇 개월 후 내게 천운이 왔는지 보란 듯이 떡하니 대기업에 취직이 되었다. 그것도 내가 독일에서 왔다는 게 면접에서 큰 플러스 점수가 되었다. 현재 회사에서 자금 및 비용을 독일에서 승인을 받아 진행하는데 깐깐한 독일인들 탓에 사업 진행이 원활히 안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취직을 하고 독일 본사와 직접 보고 사업 설명도 자세히 전달하고 했더니 어느 정도 삐걱거리던 일이 차츰 풀리기 시작했다.

봉주르 밖에 못하던 내가 프랑스에 온 지 4년 만에 일이다.


그다음부턴 어머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며느리가 그렇게 팔푼이가 아니란 걸 이제 아시는 모양이다.

 

난 살가운 며느리는 아니어도 그저 성실한 며느리로 남아 있으면 족하다.

시댁과 나의 관계는 평행선일 뿐 더 좁아질 수가 없다. 나도 되려 그게 편하다.

죽어다 깨어나도 여우같이 시댁 비위를 맞춘답시고 내가 알랑 방귀 뀔 타입이 아니다.

어차피 나는 문화며 언어가 다른 외국 며느리라 차츰 시간이 가면 진정성을 알아주시리라 믿는다. 그것이 전달이 안되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뭐.

Tant pis! (할 수 없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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