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논노 Oct 24. 2021

내게 강아지가 있었던 게 맞을까

개가 있던 자리

심심하다무료하다원래 나는 이런 감정을 자주 느끼는 사람이 아니다나는 심심하다라는 원형의 감정을 잘 느껴본 적이 없다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기에 초등학교 때는 아예 학원에 다니지 않았고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다닌 학원은 5개가 전부다친구들이 학원에 가고 난 후 남은 아이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혼자서도 잘 노는 법을 배워야 했다그때의 내공으로 나는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가 되었다.


키우던 강아지 정호가 떠난 후로 나는 자꾸 심심하고 무료하다회사가 끝난 후집에서의 시간이 생각보다 기네퇴근 후 시간을 부지런히 쓰려면 쓸 수 있구나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근데 예전에는 뭐가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빨리 갔는지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너와의 산책을 미뤘는지 모르겠다.


정호가 떠난 후의 일상은 똑같았다새벽 내내 울어도 너무나도 평온하게 해는 떴고울다 지쳐 1시간밖에 자지 못해도 늦지 않고 출근했다졸린 것을 꾸역꾸역 참아내고 일을 쳐냈고불과 3시간 전까지만 해도 공허하게 울던 나는 회사 사람들이랑 웃으며 점심도 많이 먹었다어떻게 나의 식욕은 감정에 전혀 지배받지 않는 부분이 의아했다어떻게 이렇게 멀쩡히 회사에 다니고사람들이랑 웃는 내 자신이 혐오스럽기도 했다네가 지금 내 옆에 없는데 나는 이렇게 잘 웃고 있구나


네가 떠난 지 1년이 넘자 허무하게도 네가 없던 빈자리가 이제는 더 이상 크게 느껴지지도 않았다내가 오면 너의 반응이 어땠는지도 가물가물해지기도 했다어릴 때는 달려 나와서 반겼던 것 같기도 하고, 7~9살 즈음에는 걸어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좀 더 늙어서는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네가 죽기 전에는 얇아지고 작아진 몸을 겨우겨우 이끌고 미끄러지면서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내 기억은 조각조각이다흐릿하기도 하고사실대로 말하면 너와의 일상이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너와 함께 했던 지난날의 평범하고도 소탈한 하루하루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그래너는 그냥 늘 몇십 년씩 그 자리에 있는 장롱이나 티브이 같았다우리가 밥을 먹을 때는 너도 밥을 먹고우리가 잘 때 같이 자고정말 너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요즘은 나와 정호가 정말 함께 살았던 것이 맞을까라는 생각도 든다사진에 이렇게 네가 이렇게 네 발로 서 있는데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요즘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강아지들자전거 앞주머니에 앉아서 바람을 마음껏 맞이하는 강아지들카페에 보호자 옆에 안겨 있는 강아지들호텔에서 같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강아지들보호자와 같이 서핑을 하는 강아지들같이 캠핑을 가는 강아지들해변과 한강 강가에서 뛰노는 강아지들눈을 돌리면 반려인과 행복해하는 강아지들이 많이 보인다정호는 늘 나와 집에만 있었다.


이제 나는 마음만 먹으면 차를 살 수도 있고반려견 동반 호텔 돈을 더 내서라도 갈 수도 있. 일부로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지도 않는다네가 아닌 부질없는 인연들에무엇에그렇게 시간을 할애하고 집착하고 매여있었을까?


나는 이제 돈이 있고, 더 이상 인간관계에 미련이 없는데, 이제야 사회생활에 적응해 회사 끝나고도 좀 체력이 생겼는데, 너와 모든 것을 함께 할 준비가 됐는데, 장장 16년에 걸쳐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이제는 네가 없다. 


네게 수영 한번 못 시켜준 내가
바다 냄새를 못 맡게 해 준 내 자신이 너무 밉다. 16년 동안 조금 더 노력하면 할 수 있었던 일들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자신이 가장 후회스럽다정호너와 특별한 추억 하나 없는 게 나는 정말 슬프다생생하거나 강력한 추억 하나 없어 네가 더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해서 더 서글프다.


정호 네가 내 옆에 있었는지너와 함께하는 동안 우리는 무얼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나는 늘 무료하고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과연 내 곁에 정호가 있었던 것이 맞을까

  

이전 07화 나는 진짜로 노견이 죽을 줄 몰랐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