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배신자인가

호주에서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었다.

by LC
"퍼스로 돌아 갈게요."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마크 형은 카나본에 같이 있자고 했다. 내일부터 농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데, 왜 퍼스로 돌아가려 하느냐는 형의 말. 하지만 나에게 있어 이번 결정은 단순히 돈과 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행, 시간과 돈. 그리고 일과 사람, 정(情)의 문제. 한편으로는 혼자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고, 더 중요한 것은 퍼스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큰 후회를 할 것만 같았기에 나는 퍼스행을 결정했던 것이다.




꼭 가야 해?


내가 퍼스행을 선언했을 때, 지금까지 침묵을 지켜왔던 기욱마저도 입을 열었다.

기욱의 걱정스러운 표정 속에 깃든 슬픈 눈빛. 나는 그런 기욱에게 "미안하게 됐다."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카나본에 남아 일을 할 수 있도록 농장주와 이야기를 해 놓은 상태였고, 농장주에게 나는 '하루'만 일하고 퍼스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 밤은 우리가 호주에서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었다. 마지막 밤은 축하의 분위기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우울한 분위기로 점철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었고, 슈퍼마켓에서 사 온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 누구도 '내가 퍼스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서로에게 잘 자라는 말을 하며 잠이든 그런 밤이었다.


카나본의 농장은 거대했다.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것처럼 보이는 바나나 농장에서 우리는 수박 모종을 심었다. 농장 안에서도 차를 타고 한참을 더 들어갔고, 바나나 나무로 가득 찬 농장 한쪽에 수박 농사를 짓기 위한 땅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신나게 모종을 심었다. 마크 형과 기욱은 지쳐갔지만 나는 일은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고 빠르게 척척 일을 해 나갔다. 어쩌면, 오늘이 호주의 농장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한편, 나는 일을 끝마치고 돈을 받을 때 농장주에게 물었다. "내가 급한 일이 생겨서 퍼스에 가게 됐는데, 나중에 돌아왔을 때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라고. 농장주는 나에게 "일을 시켜 주겠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무엇하나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 플랜 B(Plan B)를 생각해 놓아야만 했다.


호주에서 일했던 마지막 농장. 나는 여기를 끝으로 더 이상 농장일을 하지 않았다. 바나나 나무가 빼곡히 늘어선 농장에서 수박을 심었다.


일을 끝내고 백팩커스로 돌아오니 스티브 형님과 소피 누나가 와 있었다. 우리가 카나본에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들도 카나본으로 온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공장'에 가기 위해 오늘 밤 퍼스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LC, 진짜 가는 거야? 공장에서 주당 20시간도 일 못하는 사람들 많아. 페이도 안 좋을 수도 있고. 여기서 그냥 주 40시간 이상 일하면서 돈 모으는 게 낫지 않아?"


스티브 형님도 내가 퍼스로 떠나는 것을 만류했다. 카나본에서는 일자리가 '확실'하지만, 퍼스의 공장에서는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몇 시간을 하게 될지, 얼마를 받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이고 농장보다 돈을 더 적게 벌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이유로 나에게 떠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 형, 더 잘 되든 안 되든 일단 가기로 결정했으니 잘 되길 바랄 뿐이죠. 일 못하고, 돈 못 벌어도 후회는 안 하려고요."


함께 일했던 모든 사람들은 함께 있자고 했지만 나는 이미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이 기회를 놓치기 싫었고, 마음 한 구석엔 그들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혼자이고 싶었고, 새로운 곳에서 다시 한 번 시작해 보고 싶기도 했다.


퍼스행 버스. 나는 이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새벽 2시, 버스.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를 때, 내 뒷모습을 바라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카나본의 밤은 차가웠다. 주황색의 가로등 불빛들이 뒤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모든 것들이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엔 소멸되었다.

많은 생각을 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나는 다시 카나본으로 돌아오지 못 할 것이라고, 아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남과 헤어짐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당연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마크 형과 기욱을 떠올렸다. 배신자. 양아치 새끼.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만남과 헤어짐. 일과 일자리를 찾아 정착과 떠남을 반복하는 여행자. 그것이 워홀러의 숙명이라 믿고 싶었다.


퍼스를 향해 가던 중 만난 풍경.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기대감은 이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찾아왔다.



앞 이야기

- 두 개의 일자리가 생긴 하루.

- 꿈 이야기

- 더 멀리 북쪽으로

- 가끔은 바다.

- 다시 구직자의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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